올해 9월 초 의정부교구는 동두천 지역 난민들을 위해 가톨릭난민센터를 건립했다. 그동안 이주사목 센터를 중심으로 난민사목을 해오면서 난민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 마련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새롭게 완공된 난민센터는 그야말로 난민에게 대환영이고 커다란 선물인 셈이었다. 동두천시 보산동에 들어선 난민센터는 난민 가정 및 이주민 가정의 어린이와 청소년의 공부·체험활동, 난민 상담 등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난민센터가 들어선 보산동 일대에는 정치적, 종교적 탄압을 피해 고국을 탈출해 국내로 들어온 아프리카 출신 난민 신청자 약 700명이 거주해왔다.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가장 먼저 의정부교구가 난민센터를 건립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교구가 난민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난민센터 완공을 기념해 지난달 29일 축복식이 열린 자리에서 의정부교구 이기헌 주교는 다음과 같이 난민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하고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했지만, 유엔 회원국의 난민 인정률이 35%인 데 비해 우리는 2%밖에 안 된다. 겉으로는 난민을 보호하는 대열에 섰다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형편없는 대우를 하고 있다. 난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만큼 앞으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쏟아 달라.”
이처럼 난민에 대한 의정부교구의 관심과 배려는 이미 지난해부터 시작된 1본당 1난민 가정 돌봄 사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첫 가톨릭난민센터 운영에 커다란 장애를 만나게 되었다. 축복식 이후 운영을 하기 위한 개소식을 하려 했지만 취소되고 건물 외벽에 붙어 있던 난민센터 간판도 떼어졌다. 일부 주민들이 뒤늦게 난민센터 운영 소식을 듣고 시청을 항의 방문하여 소음, 치안, 지역개발 저해 등을 이유로 개소를 반대했다. 논란이 커지자 의정부교구는 개소를 무기한 연기했다. 의정부교구 측은 최근 시 관계자, 주민 등과 만난 자리에서 “주민들의 우려와 반발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서 “주민들과 협의가 될 때까지 난민센터는 운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가톨릭교회가 이주사목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괜찮지만 난민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지역주민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차별과 배제의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랜 시간 한국에 입국한 이주노동자를 차별하고 착취하며 비인격적인 취급을 했던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난민’ 역시 한국을 비껴갈 수 없기에 이주노동자처럼 우리가 껴안아야 할 이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난민에 대한 한국인의 혐오는 도를 넘고 있다. 어떤 학자가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너무도 멀리 있는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전해주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함께 부를 수 있지만, 그 난민들을 우리나라로 들이고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살게 한다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멀리 아프리카에 있으면 위협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조할 수 있지만,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환대의 대상이 아니라 적대의 대상이 된다.”
내 안에 있는 타자, 그들이 바로 난민이다. 내 안에 있는 타자는 내 속에 있지만 내가 지배할 수 없기에 힘들고 어려운 존재다. 구약에서 본다면, 타자의 형태로 등장하는 존재는 이방인, 과부, 고아 등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이 시대의 이주노동자, 다문화 가정, 노숙자, 난민 등과 같이 나그네 된 사람들 혹은 사회적 편견과 괄시 속에서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과 같은 부류다. 하지만 타자 없이, 이웃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율법학자의 “누가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초주검이 된 타자인 유다인을, 섬김을 받아 마땅한 이웃으로 대접한 사마리아인을 제시한 것이다. 타자의 신음에 무조건적인 환대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무조건적 환대의 원칙’이 이 시대 모든 타자에게 적용되어 혐오와 적대보다는 관용과 포용의 결과를 낳기를 바란다. 하루빨리 의정부교구가 난민센터를 개소하여 지역주민과 난민이 공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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