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풀이 모두 다 뿌리 있으나/ 부평초 홀로 뿌리가 없어
물 위를 두둥실 떠도는 신세/ 언제나 바람에 불려 다니네
살려는 의지 없으리요만/ 붙인 목숨 진실로 작고 가늘어
연잎이 너무도 업신여기고/ 마름은 줄기로 칭칭 감아 조이네
한 연못 속에서 같이 살아가면서도/ 왜 이다지 몹시도 어긋남인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시절 쓴 ‘부평초’(浮萍草)라는 고시다. 부평초는 세상을 떠도는 가련하고 약한 이들을 비유할 때 쓰이곤 한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세상살이가 떠올라 마음이 아리다.
부평초는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물 위에 떠서 바람 따라 이리저리 떠다닌다. 인간은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다. 그러나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에서 배가 고파서, 인간답게 살고 싶어 목숨 걸고 고향을 떠나 남한에 뿌리를 옮겨 보지만 이 땅에서 깊이 뿌리내리기까지 말만 통할 뿐이지 전혀 다른 의식과 사고방식, 문화적 격차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너무 힘겹다. 북한이탈주민들 사이에 “북한에서는 배고파서 못 살겠고, 중국은 무서워서 못 살겠고, 남한에서는 몰라서 못 살겠다”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땅에 존재의 뿌리를 옮겨 살 때 필연적으로 이질감과 소외감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굶주림과 가족의 죽음, 소중한 이들과의 갑작스러운 이별, 중국 체류기간에 겪은 불안 뒤에 엄습해 오는 공포감과 죄책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이념과 체제, 사상이 전혀 다른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로서 감내해야 하는 차별과 편견, 적대감이다. 이 거센 파도는 남한을 떠나 또 다른 나라로 그들을 유랑 떠나게 한다. 남도 북도, 중국인도 아닌 정체성의 혼란은 배고픔보다 더 쓰리고, 외로움보다 더 지독하게 몸서리치게 한다.
풍전등화와 같은 남북관계 속에서 탈북자라고 불리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부평초처럼 한 연못에서 함께 살면서도 어디론가 또 떠돌아야 할 것 같은 신세처럼 처량해지고 비참해진다. 어느 한 곳에 안착하고 싶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조차도 남북 분단의 상흔 속에서 가슴에 소망으로 품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가슴 먹먹하다.
머리 둘 곳조차 없던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마음의 뿌리를 깊이 두셨기 때문에 처절한 수모와 십자가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으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 아이들 마음이 영원한 고향이며 보금자리인 하느님 사랑 안에 깊이 뿌리내리기를. 그래서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 시민으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