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첫 주를 맞으며 전국 교구가 일제히 발표한 2021년 사목교서들은 코로나 팬데믹 속에 교회와 신자들이 지향해야 할 신앙의 실천을 각자 고유한 특성에 따라 적절히 제시하고 있다. ‘복음의 기쁨을 증거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교구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의 정신을 살자고 당부하는 교구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을 실천하자고 강조하는 교구들의 염원에는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인 ‘선교’가 밑바닥에 깔려있다. 가정과 본당, 세상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전해야 하는 선교적 교구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선교를 핵심으로 하는 사목’(「복음의 기쁨」35항)이 되도록 ‘찾아가는 사목’, ‘함께하는 사목’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고 밖을 향해 잃어버린 양들,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고 함께 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는 그리스도교 신자로 만드는 교세확장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교회가 체험하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이며 나눔이다. 바람직한 선교를 실천하는데 모델이 될 수 있는 한 은수자의 삶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중세 영국 신비가로 알려진 노리치 줄리안이다.
줄리안의 일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아마도 1342년 태어나 봉쇄 은수자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흑사병이 창궐하고,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거기에다가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되어 있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총체적 재난 시대였다. 정말 암울하고 희망이 없는 때에 줄리안은 환시를 통해 세상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주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궁극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어 재난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깊은 위안을 준 은수자다.
줄리안은 은수자가 되기 전 30세 때 중병에 걸려 병자성사를 받을 정도로 사경을 헤맸는데, 이 때 16번에 달하는 환시를 경험했다. 이러한 신비체험을 한 후 병에서 회복되어 은수자로서 살았다. 이 당시 은수자는 옛날처럼 세속을 떠나 사막에서 은둔 생활을 했던 것과는 달리 세속을 떠나 성당에 딸린 작은 방에서 평생 기도와 관상에 전념하며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살았다. 그의 방에는 창문이 세 개 있었는데, 하나는 음식과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창문이었고, 하나는 교회의 제단을 향해 나 있는 창문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교역과 상업 중심지였던 노리치의 부산한 거리를 향해 나 있는 창문이었다. 줄리안은 거리로 난 창문을 통해 재난 속에서 위안을 얻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는 작은 방에서 ‘종신 자가격리’ 생활을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한 ‘세상 속 은둔 수도자’였다.
줄리안이 자기 자신과 하느님과의 대화만을 위해 두 개의 창문만 사용하고, 세상 소음이 시끄럽다고 거리로 나 있는 창문을 닫아버렸다면 자기만족을 위한 은수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창문을 통해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해주었기에 진정한 은수자로 우리의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것이다. 작년에 방송되고 얼마 전에 영화로 개봉된 ‘봉쇄수도원 카르투시오’를 관람하면서 느낀 것은,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채 고독 속에 수도생활을 하면서도 수도자들은 기도와 미사 중에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의 사연이 담긴 쪽지를 읽으면서 그들을 위해 기억하고 기도해준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향한 창문을 닫아거는 교회라면 폐쇄적인 교회, 자기중심적인 교회이고, 신자들끼리만 소통하고 나누는 공동체는 이기적인 공동체, 이기적인 신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도 세 개의 창문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세상을 향한 창문이 코로나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노리치의 줄리안처럼 세상을 향해 나 있는 창문으로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자비롭게 바라보고, 소통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이 재난 시대에 종교의 기본 사명이고 선교가 아닐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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