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미사 때, 순례객들에게 성지 소개를 하고 있다. 요즘은 성지 역사보다는 순례 중 머물렀으면 하는 묵상 주제를 나누고 있다. 묵상 주제는 ‘김대건 신부님과 순교자들로부터 이어진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질문을 다시 한 번 제대로 보자. 하느님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하느님은 ‘나’에게 누구이신지 묻는 것이다.
많은 분께 하느님이 누구신지 물으면, 창조주, 참으로 사랑이신 분 등 잘 알고 계신다. 그런데 창조주시고 참사랑이신 하느님이라고 하는 하느님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으면 분위기가 묘해질 만큼 침묵이 흐른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함께 살아감이다. 그럼 ‘나’에게 하느님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얼마 전 성지에 낙엽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을 때였다. 절경의 성지 길에서 한 아빠가 조그만 아이에게 성호경을 가르치는 모습을 봤다. 고사리손으로 성호를 그리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기특해서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중 아이에게 “우리 친구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에요?” 하고 물었는데, 아이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하느님은 저한테 세상 전부에요!”
그리고 그 답의 이유 또한 놀라웠다. ‘엄마 아빠가 있기에 자신이 있는 것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기에 엄마 아빠가 있는 것이고, 하느님이 있기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을 수 있다’고. ‘그분들이 없었으면 자기는 세상에 없는 것이라, 자신에게 세상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이야기였다. 아이의 진심이 담기고 너무나 맑으며 깊은 신앙고백에 눈물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조그맣고 성호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아이의 신앙고백. 책에서도 알려줄 수 없는 아이만의 하느님을 마주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안다. 교리서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부모, 친구라는 단어도 잘 알고 있어도 책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부모, 친구는 나의 부모, 친구가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위한 분이지만 나에게 맞는, 나를 위한 모습으로 함께하시는 분이다. 나의 부모, 나의 친구처럼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면서 말이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 맺음은 77억(전 세계 인구수)분의 1의 기적이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과 기적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미 하느님과 기적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데, 왜 남이 만나는 하느님을 부러워하고, 남의 이야기 속 하느님 모습이 나에게 없는지를 한탄할까. 김대건 신부님이 만난 하느님을 나는 느낄 수 없다. 성인들에게 나타났다는 현시도 볼 수 없다. 신자분들을 울릴 만큼 강론 잘하시는 신부님이 만난 하느님도 알 수도 없다. 그런데 그게 문제인가? 남이 만나는 아름다운 하느님을 부러워하고 배 아파할 시간에 투박해도 은은하게 따뜻한 ‘나’의 하느님, 길에서 만난 아이처럼 찐하게 느끼러 하루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