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우울과 불안 속에 지내오던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사한 다큐멘터리 한 편을 잊을 수가 없다. 작년에 TV 시리즈와 영화로 방영되고 상영된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에 관한 것이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11명의 카르투시오 수사들의 삶이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큰 감동과 화제를 모았는데, 일평생 봉쇄 구역을 떠나지 않고 독방에서 엄격한 침묵과 고독 속에 스스로 선택한 가난의 삶을 살아가는 수사들의 일상은 보는 이의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이 영상물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은, 초대 안동교구장이신 두봉 주교님이 수사들의 삶을 담은 영상물 한 장면 한 장면을 맛깔스럽게 해설해주는 ‘5분 랜선 피정’ 시리즈이다. 90세가 넘으신 주교님의 신앙과 삶의 깊은 내공을 엿볼 수 있다. 그 시리즈 중에 가장 감명 깊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사랑 실천의 영성’이란 주제를 다룬 영상물이다. 독방에 있는 수도자가 밖에 작은 새를 발견하고는 창문을 열어 휘파람을 분다. 새가 날아와 그의 손가락 위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그 새는 손가락 위에서 먹이를 먹으면서 뛰어 논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신의 원래 자리인 숲으로 날아간다.
두봉 주교님은 수도자와 작은 새가 함께 노는 장면을 보고 너무나 인상 깊었다고 고백한다. 그 새가 수도자의 손가락 위에 날아와 앉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누가 새를 부른다고 다가오겠는가? 그 작은 새는 자기가 수도자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에게로 날아와 놀기도 하는 것이다. 새도 사랑을 느끼기에 사랑을 베푸는 수도자에게 날아온다. 수도자는 누구인가? 그는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수도자의 사랑이 얼마나 풍부하면 새까지도 그 사랑을 느낄 정도라는 것이다. 두봉 주교님은 당신도 그렇게 사랑을 풍겼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사랑을 풍기는 삶’이 되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한다.
동물까지도 사랑을 느낄 정도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만약에 반려견은 애지중지하면서 옆에 있는 가족이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려견에 대한 사랑은 ‘자기중심적 사랑’에 불과하다. 자기 가족은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고 외면한다면 그 사랑은 ‘이기주의적 사랑’이다. 카인은 아벨 못지않게 하느님을 사랑하여 정성껏 자기 소출을 바쳤지만 아벨의 소출만을 거두신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동생 아벨을 살해한 것은 ‘소유적인 사랑’의 말로다. 최근에 일어난 16개월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은 입양부모의 아이에 대한 ‘가짜 사랑’의 결과다. 작은 새까지도 느낄 수 있는 진짜 사랑을 풍기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기꺼이 아낌없이 내어주는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한다.
코로나19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시대에 진실한 사랑을 풍기는 사람이 많다면 굳건히 이 시련을 견디며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하면서 오히려 인간관계는 더욱 삭막해지고 서로 간 미움과 증오, 혐오로 인해 단절과 분열,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고, 차별과 배제가 보편화되면서 진실한 사랑은 실종된 듯하다.
어떻게 하면 진실한 사랑을 풍기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있을까? 처음에는 너무 작아 볼품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나중에는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 이야기처럼, 아주 작은 실천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한다. 올해 본당에서 새롭게 실시하는 사목 중에 ‘칭찬합시다!’ 프로그램이 있다. 칭찬은 하느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시키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는 예수님의 말씀을 수도 없이 듣지만 삶의 현장에서 실천을 잘 못하고 있다. 상대방에게 먼저 미소 짓고 인사를 하는 것에서부터 상대방의 상황을 배려해주는 것, 더 나아가 잘한 것에 대해 서슴없이 칭찬해주는 것 자체가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믿는다.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일으킨다는 ‘나비효과’처럼 칭찬 프로그램이 ‘코로나 블루’로 어려움을 겪는 이 시기에 복음의 기쁨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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