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교회 14개 교구에서 교황님과 ‘백신 나눔 운동’을 벌여 가난한 나라를 위해 1차 모금액 43억 원을 교황청에 전달했다고 한다. 한 명이 온전히 백신을 맞기 위한 비용을 6만 원으로 상정하면 약 7만 명이 백신을 맞을 수 있는 금액인데, 백신에서 소외된 가난한 나라에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백신 나눔 운동’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을 맞아 희년이 종료되는 11월 27일까지 진행된다. 본당별, 개인별로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어 선진국에 들어선 한국의 국제적 지위에 걸맞은 백신 나눔이 이루어지고 있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백신의 보편적 보급’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지난 부활절을 맞아 발표한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 ‘로마와 온 세계에’라는 의미)에서 “국제사회가 책임 의식을 갖고 백신 공급 지연을 극복하는 한편, 특히 가난한 나라에도 충분한 백신이 돌아가도록 힘써줄 것을 간청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미 교황청 자선소는 지난 1월 백신 나눔을 위한 온라인 기부를 시작했고, 부활절을 앞둔 성주간에 노숙인 1200명을 위한 백신 접종을 시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작년에 교황님이 선포한 회칙 「모든 형제들」의 핵심인 ‘형제애’를 실천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보겠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미국을 포함한 몇몇 선진국에서 상당수 국민은 백신 접종을 완료했지만, 저소득 국가들에는 백신 생산량의 1% 미만이 분배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백신 선도국의 독점’으로 불평등한 분배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더군다나 취약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백신 없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국가가 귀중한 백신을 부스터 샷(추가 접종)에 사용하려는 시도에 분노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백신의 불평등한 배분으로 인해 국가 간, 국민 간 계급과 위계가 형성되고 생명의 등급이라는 부정적인 결과가 예상된다. 더욱 치명적 결과는 느리고 불평등한 백신 접종으로 인해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인류 전체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국경적으로 국제적 연대와 협력, 그리고 지원을 통해 저소득 국가의 백신 접종이 반드시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일부 선진 국가의 백신 독점과 결과적인 불평등한 분배 현상은 이미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벽의 문화’(27항;146항)로 표현되어 있다. ‘벽의 문화’는 자기 보존을 위해 새로운 방어벽을 세우려는 일련의 헤게모니다. 외부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나만의’ 세상만 남게 되는 매우 이기주의적인 자기 보호에 빠지고 만다. 회칙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영성’을 제시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강도, 강도 만난 사람, 사제, 레위인, 여관 주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이 시대 상황을 성찰해본다. 벽의 문화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강도를 만난 사람), 외부와 벽을 쌓고 자신만의 세상에 안주하려는 이기주의자들(사제와 레위), 벽을 넘어 생명의 공간과 장소를 제공하는 협력자들과 사회적 인프라(여관 주인), 그리고 단절과 분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자비와 사랑, 그리고 치유와 돌봄을 실천하는 이들(사마리아인)은 각자의 선택을 보여준다. 벽의 문화로 위험과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환대하고 포용하는 자비와 사랑이 경계 없는 보편적 형제애를 드러낸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공동운명을 추구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에 책임을 가질 줄 아는”(115항) 존재다. 그러나 그 형제애가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관 주인과 같은 협력자와 사회적 인프라와의 연대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델타 변이로 4차 대유행의 소용돌이 속에 전 세계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였듯이, ‘보편적인 형제애’ 혹은 ‘열린 형제애’를 발휘하여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포용하기 위한 연대를 해야 한다. 특히 코로나 백신을 가난한 나라들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 바로 형제애의 모범을 보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백신 나눔 운동’에 참여하여 형제애를 실천해보기 바란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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