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성실하게 경청하는 태도로 상대방을 잘 이해하여 대화를 풍성하게 이끌어간다. 또 어떤 사람은 상대의 말을 온전히 듣기보다는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나머지는 흘려버린다. 이러한 확증편향적 태도로 인한 선택적 경청은 말한 사람의 정확한 의도를 알지 못하거나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아예 듣지 않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다. 몸은 말하는 상대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마음과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스갯소리로 ‘유체이탈’이라고 한다. 미사 중 주례 사제가 강론을 할 때 신자들 중에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몸은 성당에 와 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일명 ‘유체이탈 신자들’이 있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이유는 사제가 강론을 잘 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경청을 잘 하지 못하는 신자들 때문일까?
올해 홍보주일 교황 담화문의 주제는 ‘마음의 귀로 경청하기’였다. 투명하고 정직한 소통 혹은 언론은 ‘발로 뛰어’ 만나는 과정에서 사건을 경험하고 생생한 현실을 얻어야 한다는 권고의 말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통의 법칙과 참된 대화를 위한 조건으로 경청을 강조했다.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엿듣고 염탐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를 이용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경청하기보다는 서로 자기 말만 함으로써 수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전혀 소통되지 않는, 각자 독백하는 어리석음에 봉착해 있음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이주민들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우리 마음의 완고함을 완화시키려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인간은 관계에서 도피하고 등을 돌리며 ‘귀를 닫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청에 대한 거부는 종종 이주민과 같은 타자들을 향한 공격으로 변할 수 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교황의 담화문은 신앙의 차원에서 경청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구약 신명기 6,4절에 나오는 ‘쉐마 이스라엘’ 즉, ‘들어라, 이스라엘아!’ 하는 뜻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바오로 사도 역시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로마 10,17)고 확언한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데서 믿음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기도 역시 하느님께 비는 행위에 앞서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다. 하느님께 주도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는데서 신앙은 시작되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마리아의 좋은 몫’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교황은 계속해서 경청하기가 사목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경청하기를 ‘듣는 귀의 사도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자기 시간의 일부를 기꺼이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애덕의 첫 번째 행동’이라고 한다. 그렇다. 본당신부들의 가장 우선적인 사랑의 행위는 신자들에게 자기 시간을 내어 그들의 고민과 괴로움, 아픔과 상처를 수용하는 경청에서 실현되고, 그럼으로써 ‘상처입은 치유자’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당신자가 찾아와 고민거리를 이야기할 때 집중해서 잘 들어주면 나중에는 묻지도 않아도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 그가 처한 상황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경청’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만약에 상대방의 말을 대충 들으며 흘려버리거나 충고만 주려한다면 더 이상 진솔한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달변이 아니라 경청에 있다’고 한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여정의 길에서 필요한 친교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상호 경청이 우선시되고 매우 중요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