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세 노모를 집에서 모시고 사는 어느 자매님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는 딸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소통이 어렵단다. 식사부터 배변까지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며 돌보아준다고 한다. 왜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모시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런 시설에 가시면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가실 것 같아 차라리 집에서 요양을 하시는 것이 낫겠다 싶어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양보호사도 있고, 필요하다면 다른 형제들도 와서 돌보아준다고 하지만, 본인도 70대 후반이라 몸이 성치 않고, 나름대로 남은 인생을 편안히 보내고 싶어할 텐데 오히려 어머니의 남은 소중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돌봄의 영성을 실천하는 자매님의 모습에서 ‘옆집의 성인’을 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생명을 존중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안타깝다. 생명은 단지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경제적 잣대로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으로 나뉘어 쓸모가 있으면 존재할 수 있고, 쓸모가 없으면 갖다 버리는 쓰레기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 생명이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건강, 쾌락으로만 판단되는 반생명적 가치관이 죽음의 문화를 만연시키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작년에 국민 76.3%가 안락사나 의사조력자살 합법화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5년 전 조사 때보다 찬성 비율이 1.5배가량 높아졌다니 안락사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회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가족을 돌보다 가정이 파탄 나고 결국에는 간병 살인에 이르는 것을 지켜만 볼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안락사법의 도입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웰빙(well-being)만이 아니라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권리 주장도 같은 노선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최근 의사조력자살을 도입하는 법안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발의되어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현행법과 달리 ‘임종 과정이 아닌 상태’에서도 환자가 스스로 존엄사를 결정할 수 있고, 약물 투여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내용이다. 과연 의사의 조력에 따른 ‘품위 있는 죽음’이 정말로 인간답게 죽는 것일까?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최근 국회에 발의된 ‘의사 조력 존엄사’ 법안에 강력히 반대하며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의 요지는, 의사 조력 존엄사는 실제로 자살과 이에 가담하는 살인 행위이며, 인간적인 관심과 돌봄의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술이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이는데 사용된다면 모순이다. 의술이 사람을 죽이는데 남용된 대표적인 사례가 영화「You Don‘t Know Jack」(2010)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 잭 케보키언 박사는 안락사를 옹호하는 의사로 미국에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130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자살을 도왔고, 그 이유로 결국 2급 살인죄의 명목으로 수감되었다가 가석방된 적이 있다.
사실, 루게릭병이나 말기암, 알츠하이머, 전신마비 장애인 등 도저히 회복 가능성이 없는 불치병 환자들은 가족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 죽음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며,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다”(신명 32,39)는 말씀처럼 하느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시기에 인간 선택에 따른 안락사는 비복음적이고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고통을 없애려는 의도를 지향하는 안락사 행위에는 고통이 무의미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고통이 가져다주는 신비와 은총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노모를 끝까지 집에서 모시는 자매님처럼 생명의 마지막을 위한 돌봄의 배려가 따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