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4) 양근성지- 성직자를 갈망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3-07-11 수정일 2023-07-11 발행일 2023-07-16 제 335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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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간 가성직제도 운영… ‘진짜’ 사제 원하는 마음 더 커졌다
신자 중 10명 ‘사제’ 역할 맡기도
권철신·이승훈 등이 미사 집전·고해
뒤늦게 ‘독성죄’ 깨닫고 전례 중단

양근성지 ‘십자가의 길’.

양근성지를 둘러보면 여러 순교자들의 자취를 만날 수 있다. 일단 동정부부로도 유명한 복자 조숙(베드로)·권천례(데레사) 부부의 상도 있고, 동정녀 공동체의 회장을 맡았던 복자 윤점혜(아가타)의 상,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의 상 등 여러 신앙 선조들의 모습이 보인다. 양근 출신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다 순교한 권복(프란치스코)의 묘역도 있다. 양근 지역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복자만도 9위나 된다.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신앙 활동을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신앙 선조들의 활동으로 신자 수는 빠르게 늘어갔다. 그 초기에 신자들이 빠르게 늘어났던 곳이 바로 이 양근이다. 점차 성장하는 신앙 공동체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 성직자였다.

초기 한국교회를 이끈 10명의 신부(?)

양근의 수많은 신자, 그리고 순교자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는 권일신이다. 1786년 당시 양근의 신자들은 아마 그를 ‘권일신 신부’라 불렀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신부’라 불린 사람으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 이전에 ‘신부’라는 호칭으로 불리던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권일신이다.

당시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한 대책을 고민했다. 그 대안이 가성직제도였다. 서품 없이 신자들끼리 임의로 ‘신부’를 정해 교회를 이끌었던 것을 ‘가성직제도’라 부른다. 이승훈은 중국교회에서 성직자를 만났고,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직접 체험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교회 독자적인 교계제도를 만든 것이 가성직제도다.

이승훈은 1789년 베이징으로 보낸 서한에서 “내가 미사성제를 드리고 견진성사를 거행하도록 결정됐다”면서 “나는 교우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다른 열 명에게도 미사를 드리는 권한을 줬다”고 전했다.

가장 먼저 신부로 선출된 이승훈은 신심과 학식, 덕망이 높은 10명을 뽑아 신부로 임명했다. 이 10명의 신부가 모두 누구였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적어도 권일신이 신부로 임명됐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권일신,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이, 「사학징의」에 실린 ‘유관검공초’에는 이승훈, 홍낙민, 권일신이 신부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두 사료 모두 권일신이 ‘신부’로 활동했다고 말하고 있다.

권일신을 비롯한 10명의 가성직제도 신부들은 어떻게 활동했을까.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이승훈의 서한과 달레 신부의 기록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승훈의 서한에 따르면 “예절은 여러 책과 시과경에 있는 대로 하되, 좀 삭제도 하고 첨가도 했다”며 “경문은 우리 기도서에서 선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제의는 화려한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조선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 쓰는 옷과 비슷한 것이었고, 신부들은 중국에서 가톨릭 예식을 집행할 때에 쓰는 관을 썼다”고 한다. 또 “신자들의 고백을 들을 때 그들은 단 위에 높은 의자를 놓고 앉았고 고백하는 사람은 서 있었다”며 “보통 보속은 희사였고, 더 중한 죄에 대해서는 신부가 직접 회초리로 죄인의 종아리를 쳤다”고 고해성사의 풍경을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의 종 권철신·권일신 형제의 상.

진짜 성직자를 찾아

물론 권일신은 정식으로 서품을 받지 않았기에, 지금 우리는 권일신을 ‘신부’라 하지 않는다. 조선의 초기 지도자들도 이런 잘못을 깨닫고 가성직제도를 폐지한다. 가성직제도는 1786년 가을부터 1787년 봄무렵까지 약 6개월 가량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신부로 활동하던 한 사람이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던 중 가성직제도가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전했던 것이다. 이승훈은 당장 모든 성사 집행을 중단시키고 신자들에게 자신이 독성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10명의 신부 중 누가 이 사실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글은 이승훈의 편지와 함께 남아있는데, 그 글에 따르면 작성자는 이승훈에게 “책에 따르면 성직에 오르지 못했고 또 인호를 받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구도 우리 주님의 몸을 축성할 수 없다고 했다”며 “그러니 저희에게 성직을 허락한 당신이나, 당신으로부터 우리 주님의 몸을 축성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저희나 독성죄”라고 지적했다.

가성직제도는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운영됐지만, 그 영향은 상당히 컸다. 이벽의 집에 모일 정도의 신자 수가 가성직제도를 거치면서 1789년에는 1000명을 넘어서게 됐다. ‘성직자’라는 교회 지도자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교회를 이끌었고, 비록 흉내에 불과했을지라도 신자들이 전례를 직접 체험하면서 천주교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성직제도 신부들의 활동이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직접적인 계기가 됐던 만큼, 가성직제도가 중단되면서 신자 증가도 둔화되고 말았다.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알게 된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문제를 ‘진짜’ 성직자들과 상의해야 한다고 판단한 이들은 중국에 밀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그 밀사에게 이승훈의 편지를 전했다. 이승훈은 그 편지에서 조선교회가 얼마나 성직자를, 그 성직자를 통한 성사생활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전한다. 이렇게 신앙선조들은 본격적으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나섰다.

“성사가 중단된 다음부터 저희는 마치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처럼 매일 고통과 불안 속에서 지내며 구원받을 수 있기만을 밤낮으로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오신 여러분 선교사님들께 하소연하지 않으면 도대체 저희가 누구에게 소리 높여 하소연할 수 있겠습니까?”

복자 조숙·권천례 부부 동상.

순교자 권복의 묘역.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