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박해라는 큰 폭풍 속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신자들은 다시 성직자 영입을 계획했다. 이를 주도한 것이 윤유일, 최인길, 지황, 강완숙 등이었다. 신해박해 속에서도 윤유일과 신자들은 언젠가 사제의 손으로 봉헌될 미사를 꿈꾸며 포도나무를 기르고, 포도주를 담갔던 것이다.
다시 중국교회를 찾은 것은 지황과 박 요한이었다. 지황은 1794년 1월 박 요한과 함께 베이징을 방문해 구베아 주교에게 신해박해를 비롯한 그동안의 사정을 전하고 다시금 선교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지황이 조선으로 떠나고 1794년 2월 주문모 신부도 베이징을 떠나 조선 국경의 책문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선 입국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압록강의 얼음이 녹아 강을 쉽게 건널 수 없었고, 박해로 국경 감시가 삼엄해졌기 때문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다시 겨울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10개월간 만주 지방을 순회하면서 사목했다. 마침내 12월 겨울이 왔고, 지황은 윤유일, 최인길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맞기 위해 의주로 갔다. 12월 23일 자정 무렵 얼음이 언 압록강을 건너 입국했고, 1월 4일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우리말과 조선의 정세를 익히면서, 미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시키며 사목 준비를 했다. 또 성목요일에는 여러 신자들에게 세례와 보례를 주고,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마침내 1795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나라 땅에서 처음으로 미사가 거행됐다. 이 미사를 시작으로 주문모 신부는 본격적인 사목활동에 들어갔다.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자 열망하는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주문모 신부의 사목에 힘입어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됐다. 입국할 당시 4000명이었던 신자 수가 주문모 신부가 활동한 지 5년 만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 풍경을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소원이 극도에 달해 모두가 신부를 보고 성사를 받기를 원했다”면서 “오래지 않아 굉장히 많은 사람이 모여오게 됐다”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