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예레 20,7-9 / 제2독서 로마 12,1-2 / 복음 마태 16,21-27 노력에 대해 보상만을 바라는 이들 고통도 하느님의 큰 뜻으로 여기며 교만함 떨치고 주님의 길 따라가야
빛나는 성취의 순간
힘든 산행 중에 정상에 올라 스스로를 대견해하듯, ‘돌이켜 보면 굴곡은 있었으되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싶은 때가 있습니다. 왕후장상의 삶이나 천재의 삶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게 디뎌온 걸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때에’(마태 16,21), 그런 순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난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고 물으셨고, 시몬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 하고 대답했지요. 예수께서 제자들을 뽑아서 두 해가 넘도록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고 훈련시킨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어부 시몬이 드디어 예수께서 하느님이며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는 제자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며 교회의 반석으로 삼고 ‘하늘나라의 열쇠’(16,19)를 맡기십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약속에 한껏 고무되었을 터입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나를 알아주시는구나, 힘든 수련이 이제 빛을 보는구나!’ 계산이 어긋나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는 산통을 깨는 말씀을 베드로에게 던지십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16,21)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었지요. 구세주 메시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며 승리를 구가하리라는 자신의 계획과 구상이 일그러집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스승의 말씀을 반박할 수밖에요. 복음서 본문에서 ‘반박하다’(16,22)로 번역된 ‘에피티만’(ἐπιτιμᾶν)은 꾸짖고 경고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럴 수는 없다고 베드로가 외칩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도리를 잊고 자기의 뜻에 주님이 휘둘리기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내 계획과 생각에 어긋나는 현실 베드로의 충격과 탄식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의 계획과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꾸려갑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면 하느님과 세상이 그에 맞는 보상을 해주시리라고 기대하면서요. 물론 그 기대에 걸맞은 보상을 맛볼 때도 있습니다. 내가 최고라고 으스댈 정도는 아니라도, 어디 가서 목소리 낼 정도는 된다고 생각할만큼 말이지요. 그러다 보면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그러게 진작 내 말대로 하지’ 하며 혀를 차고, ‘저 사람은 당할 만하니까 당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보는 내 틀을 벗어난 일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세상이 내 계획과 계산대로 흘러가야 정의롭고 올바른 것인 양 착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그렇게 생각대로만 되던가요. 어느날 남의 일로만 알았던 고통과 고난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닥쳐올 때, 우리는 베드로의 탄식을 반복합니다. ‘하느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왜 내게, 내 세상에 이런 풍파를 일으키십니까?’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뜻을 따라야 한다는 교만이 눈과 귀를 가립니다. 하느님뿐만 아닙니다. 내 사람이라고 믿었던 이들도 원망합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너한테 쏟아부은 정성이 얼만데!’ 상대방의 삶을 인정하지 않고 내 삶의 방식대로 따르기를 강요하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내 세상’에 갇힌 사람은 결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주인도 아니면서, 언젠가는 다 내려놓아야 할 인간이면서, 우리는 하느님 행세를 하고 원망하며 탄식합니다. 하느님의 뜻 참된 제자의 삶은 내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내 생각과 내 계획이 꺾이는 고통을 겪습니다. 오늘 첫째 독서의 예레미아 예언자의 행보가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고 선언하셨지만, 예레미아는 자신이 전한 하느님의 메시지 때문에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8)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에 충실하면 세상도 그에 맞춰 변하리라는 기대가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좌절의 고통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는 시련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서 불타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합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이렇게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제2독서가 말하는 것처럼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로마 12,2) 있게 됩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 내가 계획하고 바라는 세상은 고작해야 내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생각에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남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내 좁은 세상을 까마득히 뛰어넘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아버지의 영광”(마태 16,27)은 세상 누구의 예상과 계획보다 큰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삶에 닥쳐온 고통,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내 계획과 뜻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하느님의 더 큰 뜻을 추구하게 하는 계기일 것입니다. 내 껍질을 깨는 데는 고통이 따르지만, 그 고통이 없이는 더 큰 곳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