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가 시작되다
신유박해가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신자들이 체포되고 있었다. 여주에서의 체포가 그랬고, 1800년 12월 복자 최필공(토마스)이 체포된 것이 그랬다. 같은 달 서울 복자 최필제(베드로)의 약방에 모여 기도하던 신자들이 체포됐고, 여주와 충주 등에서도 신자들이 잡혔다.
그리고 1801년 1월 10일 대왕대비 김씨가 공식적으로 천주교 박해령을 내리면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됐다. 김씨는 “사학(천주교)이 서울에서부터 경기도와 황해도 남부, 충청남도 북부까지 불같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엄한 금령을 어기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역적을 처벌하는 법률을 적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다섯 가구 단위로 서로 감시하도록 조직된 오가작통법을 철저하게 시행해 신자들을 찾아내 처벌하라는 강력한 박해를 시행했다.
박해가 시작되자 조정의 신하들은 신자들을 지목해 반역죄로 다스릴 것을 연이어 상소했다. 이미 천주교 신자로 알려졌던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2월 중에 대거 잡혀 들어갔고,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때 순교하거나 유배를 당했다.
이렇게 교회 지도층이 무너졌지만, 조정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숨어있는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지방의 교회 지도층들도 대거 붙잡혔다. 붙잡힌 신자들은 서울로 압송됐고, 사형 집행을 결정하는 결안(結案, 사형할 죄로 결정한 문서)이 확정된 뒤 각자 태어난 지방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신유박해의 순교자들
양섬에서 잡힌 순교자들도 다시 여주로 돌아왔다. 순교자들은 지금의 여주성당 인근 비각거리에서 순교했다. 그 순교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순교 치명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박해의 한가운데에서도 여주의 순교자들은 의연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갔다고 전해진다. 의술을 익혔던 복자 이중배는 옥중에서도 많은 환자를 치료했고, 양섬에서 부활 잔치를 주최했던 정종호는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았다. 이 신자들을 만난 포졸마저도 신자들의 모습에 감화돼 신자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신자들의 열심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서슬 퍼런 박해가 1년 동안 가혹하게 이어졌다. 이때 순교한 신자의 수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황사영(알렉시오)이 쓴 「백서」에 따르면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인데, 지방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고,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순교자의 수가 적어도 200명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성이나 이름을 파악할 수 있는 순교자는 110여 명가량 된다. 이 순교자들을 살피면 여자 신자보다는 남자 신자가, 지방보다는 서울 지역 출신 신자가, 신분상으로는 양반 신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교회를 이끌던 지도층에 해당하는 신자들이 많이 잡혔고, 순교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신유박해 이후 조선 신자들이 베이징교구에 보낸 서한에 따르면 박해 직전 1만 명 정도였던 신자가 박해 이후 수천 명으로 줄어들어 서울과 지방에 흩어졌다고 한다. 순교와 유배, 배교 등으로 적어도 1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희생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유박해의 참상은 신자가 아닌 이들조차도 “조선이 건국된 이래 올해처럼 사람을 죽인 수가 많은 적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