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해 교회 쇄신 이끌어 간 ‘평화의 교황’
축일 10월 11일
불가리아 등에서 교황청 외교관 활동
1958년 76세에 교황 선출돼 5년 재위
인류 전체 위한 회칙 「지상의 평화」 발표
성 요한 23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해 교회 쇄신과 개혁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261대 교황으로 5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재위했지만 세상을 향해 교회의 문을 열고, 세상과 대화하는 교회로 이끌었다. 굳은 신앙을 바탕으로 어느 순간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고 ‘착한 목자’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성 요한 23세 교황의 삶을 알아본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성 요한 23세 교황의 세속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로,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 인근의 소토 일 몬테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학업에 특출했던 안젤로 론칼리는 11살이던 1892년 베르가모의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01년 교황청립 로마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이어갔다. 안젤로 론칼리는 1904년 8월 10일 로마 포폴로 광장 인근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 론칼리 신부를 눈여겨봤던 신임 베르가모교구장 자코모 마리아 라디니 테데스키 주교는 그를 자신의 비서로 임명했다. 이후 론칼리 신부는 테데스키 주교를 수행하며 시노드와 교구 행정, 순례, 사회사목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테데스키 주교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론칼리 신부도 노동자들의 고충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주교 비서직을 수행하면서도 신학교에서 교회사와 교부학 등을 가르쳤다. 1914년 아버지처럼 따랐던 테데스키 주교가 선종하자 론칼리 신부는 500쪽에 이르는 그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론칼리 신부는 이탈리아 육군에 징집돼 군병원에서 사목했고, 이어 군종 신부로 활동했다. 당시 겪은 전쟁의 참상은 그가 세계 평화에 대한 갈망을 갖게 했다. 전쟁 후 1919년 신학교로 돌아온 론칼리 신부는 1921년 베네딕토 15세 교황의 부름을 받았다. 교황은 론칼리 신부에게 교황청 전교회 이탈리아 지부장을 맡겨, 조직을 근대화하고 국제화하는 임무를 맡겼다. 론칼리 신부는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교황청 외교관으로
비오 11세 교황은 1925년 론칼리 신부를 주불가리아 교황청 순시관으로 임명했다. 대주교로 서품된 론칼리는 이후 10년 동안 동방정교회 신자가 다수인 불가리아에서 작은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이익을 수호하는 어려운 일을 수행했다. 외교관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론칼리 대주교는 재치와 인내, 훌륭한 유머 감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불가리아 정부와 동방정교회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길을 열었다.
이어 1935년 론칼리 대주교는 터키와 그리스 주재 교황사절에 임명됐다. 이곳에서도 동방정교회와 이슬람교를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가톨릭신자들을 돌봤다. 임기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점령당한 그리스를 돕고 유다인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1944년 비오 12세 교황은 론칼리 대주교를 주프랑스 교황대사로 임명했다. 교황청 외교관으로 한직을 전전하던 그가 교황청 외교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일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교회는 독일 점령 때 나치에 협력했던 주교들의 일로 분열돼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나치에 부역했던 주교 25명을 소환해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지만, 론칼리 대주교는 이들이 나치 정부에 협력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결국 주교 3명이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문제를 마무리했다. 이후 론칼리 대주교는 프랑스의 성지를 순례하고 여러 축제에 참가하며 프랑스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교황 선출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
1953년 론칼리 대주교는 추기경 서임과 함께 이탈리아 베네치아 총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사제로서 신자들과 생활하기를 오랫동안 꿈꾸던 론칼리 추기경은 주님에 대한 신뢰와 지혜로 열심히 사목을 펼쳤다. 본당을 방문해 미사를 봉헌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베네치아 총대교구장으로서 은퇴를 꿈꿨지만 주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1958년 비오 12세 교황이 선종하자, 76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콘클라베에 참석한 론칼리 추기경은 그해 10월 28일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그는 교황명으로 요한을 선택했다. 거의 20년에 가까운 비오 12세 교황의 재위 이후 유력한 교황 후보는 밀라노대교구장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대주교였다. 하지만 몬티니 대주교는 아직 추기경 서임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추기경들은 잠시 교황직을 수행할 ‘과도기’ 교황으로 성 요한 23세 교황을 선택했다. 추기경들은 새 교황이 몬티니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서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성 요한 23세 교황은 이러한 추기경들의 바람과 달리 교회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교회가 현대 세계에서 어떻게 본연의 소명에 충실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그 해답이 공의회 소집이었다.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6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에서는 전례개혁을 비롯해 그리스도인 일치운동과 타종교와의 대화, 평신도 사도직, 주교들의 단체성 등 교회 쇄신을 위한 논의가 지속됐다. 4차 회기에 걸쳐 열린 공의회는 후임인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마무리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말년 위암을 앓았다. 1962년 9월 위암 진단을 받았지만, 공의회 직전이었기 때문이 이 사실을 숨겼다. 그해 10월 공의회 기간 중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전쟁의 암운이 드리우자, 성 요한 23세 교황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재에 나섰다.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양측은 교황의 중재로 위기를 해결했다. 그리고 교황은 1963년 4월 11일 위암 투병을 하면서도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발표했다. 그가 ‘평화의 교황’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결국 성 요한 23세 교황은 1963년 6월 3일 선종했다. ‘착한 목자’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교황은 2000년 9월 3일 시복됐고, 2014년 4월 27일 시성됐다. 축일은 선종일이 아닌 10월 11일이다. 이날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시작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