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소박한 구유를 만들고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에 포대기에 싸인 아기 예수님을 눕히며 경배한다. 올해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교회 역사상 최초로 구유를 꾸미고 구유 예식을 거행한지 꼭 800년이 되는 해다. 1223년 이탈리아 그레치오(Greccio)에서 재현된 구유의 의미와 그레치오의 성탄 800주년 전대사를 소개한다.
그레치오에서 재현한 새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의 모습은 3세기부터 벽화와 모자이크화, 대리석 부조로 볼 수 있었다. 5세기부터는 은이나 나무 등으로 조각한 구유가 생겨나며 신심이 표현됐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구유의 형태와 구유 예식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비롯한다.
1223년 11월 말 호노리오 3세 교황에게 자신의 규칙서를 추인받고 로마에서 되돌아가던 길, 성인은 그레치오의 동굴을 보고 문득 베들레헴을 떠올렸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든 영성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기반한다. 그에게 육화 사건은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베들레헴의 정경을 닮은 그곳에서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장면을 생생히 재현하고 엄숙히 기념하고자 했다.
성탄 구유의 의미와 가치에 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서 「놀라운 표징」에서 이처럼 밝힌다. “「프란치스코 전집」에는 그레치오에서 일어난 일이 상세히 설명돼 있습니다. 주님 성탄 15일 전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고장에 사는 요한이라는 사람을 불러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필요한 것 하나 갖추지 못한 그 갓난아기가 겪은 불편함을 최대한 생생하게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었는지, 그리고 황소와 나귀 옆에서 그 갓난아기가 어떻게 건초더미 위에 누워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
요한의 도움으로 그레치오에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본뜬 소박한 구유가 만들어졌다. 12월 25일이 되자 많은 지역에서 형제 수사들이 모여들고, 주민들은 밀초와 횃불을 준비해 왔다. 건초더미가 가득 담긴 여물통이 준비되고, 황소와 나귀도 끌려왔다. 구유 앞에서 사제는 성찬례를 거행했다. 어두운 밤은 무수히 빛나는 불빛으로 밝혀졌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노래가 거룩함을 더했다. 부제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 중에 누군가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다는 환시의 은총 이야기도 전해진다.
프란치스코회 기경호(프란치스코) 신부는 “성인이 그레치오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재현한 것은 단순한 예식 행위가 아니라 육화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고자 했던 열망의 표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성당이 아닌 베들레헴 외양간 같은 곳에서, 성직자들이 아닌 하느님 백성이 직접 주인공이 되는 구유 예식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육화의 신비에 담긴 하느님의 겸손과 가난
프란치스코 성인은 구유를 통해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의 겸손과 가난함을 보고자 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이뤄진 자기 비움과 가난의 영성을 신자들과 나누려 했다. 성인의 소망처럼 성탄 구유는 가난한 아기의 모습, 제대 위 작은 빵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의 작음과 겸손으로 완성된 구원 사업을 떠올리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서 「놀라운 표징」을 통해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되셨고, 모든 이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려 웃으시며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셨다”고 밝혔다. 아울러 “성탄 구유는 그 기원인 프란치스코 성인 때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성자께서 강생하심으로써 몸소 택하신 가난을 느끼고 만져 보도록 우리를 초대해 왔다”며 “이는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께서 나아가신 겸손과 가난과 내어줌의 길을 따르라는 호소를 함축하고, 가장 곤궁한 형제자매들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고 섬기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나약하고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세상 속에서 소외당하고 잊혀져가는 또 다른 아기 예수와 같은 존재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성탄의 신비를 살아내는 일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구유 예식을 통해 아기 예수의 탄생이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사건임을 전하고자 했다.
구유 예식를 하며 전에 없던 기쁨을 체험한 프란치스칸들은 이를 세계 곳곳에 널리 전파했다. “누구나 베들레헴의 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연약한 어린 아기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경배해야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63항)는 말처럼, 프란치스코에 의해 이뤄진 작은 사건은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 재현되고 기념되며 하느님을 만나도록 이끈다.
800주년 전대사 수여
교황청은 그레치오의 성탄 8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올해 성탄 구유를 프란치스코 성인이 만든 그레치오의 구유를 연상시키는 모형으로 만든다. 마리아, 요셉, 아기 예수, 황소와 나귀와 같은 전통적인 구성 요소 외에도 성 프란치스코와 그가 구유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 주요 인물들을 표현할 계획이다.
교황청 내사원도 구유 공경의 기원인 그레치오 성탄 800주년을 맞아 올해 12월 8일(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부터 2024년 2월 2일(주님 봉헌 축일)까지 전 세계 모든 프란치스칸 성당에 방문해 구유 앞에 머물며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전대사를 수여한다.
그레치오 성탄 800주년 전대사는 해당 기간 ▲프란치스코 가족 수도회 성당에 설치된 구유 앞에서 기도하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하며 ▲교황 지향에 따라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을 바치면 받을 수 있다.
한국의 프란치스칸 수도회 연합인 프란치스칸가족봉사자협의회(회장 정진철 마르코 신부)도 신자들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12월 25일(주님 성탄 대축일)부터 1월 8일(주님 세례 축일)까지 프란치스칸 성당 21곳을 개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