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받으신 어머니로 인해 온 집안 입교
어르신들 마다 신학교 입학 권유
1938년 열네살에 유스티노 신학교 입학
3년전인 1999년 8월 28일 정년으로 부산교구장직에서 물러난 이갑수(가브리엘·78) 주교. 28년동안 제2대 부산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오늘과 같이 크게 발전한 부산교구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이주교는 퇴임 3년전 주교 서품 25주년 기념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성직자들이 평신도들보다 덜 열심할 때, 이것은 「위험신호」』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은퇴 후에도 각 본당 견진성사 주례나 특강 요청에 응하고 있는 이주교는 오늘도 『인간사 모든 분쟁의 가장 확실한 해결방법은 사랑』임을 역설하고 있다. 특별히 부부간의 불화도 「상대방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때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갑수 주교는 당신의 모토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AMO TE DOMINE)」대로 평생 「사랑을 사는 분」이다.
내가 신학교에 가게 된 특별한 동기는 없었다. 굳이 동기를 말하라면 당시 본당신부님을 비롯한 주위 여러 분들의 권유로 신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생 때라 신학교가 뭣하는 곳인지도 몰랐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러 선배, 동료 사제들과 달리 내가 구교우 집안이 아닌데도 신부가 된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진다. 특별히 영세한 지 얼마되지 않으셨던 부친께서도 나의 신학교 행을 권유하셨던 점은 기억에 새롭다.
내가 사제가 되기까지 과정은 이렇다. 나는 1924년 2월29일 경북 영천군 영천읍 성내동 99번지에서 부친 이능호(가시미로), 모친 최순이(루피나)의 3남4녀 7남매중 3남으로 태어났다. 비신자였던 어머님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영천 화산면 용평에는 현재 예수성심시녀회의 전신으로 몇몇 동정녀들이 공동체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머님께서 병환으로 누워계실 때 용평에 있던 정녀 율리아씨가 자주 병문안을 왔었다. 그 율리아씨로부터 어머님이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것이 우리 집안이 천주신앙을 받아들인 계기가 됐다. 아버님께서 먼저 세례를 받으시고 여동생도 영세했다.
그후 나도 아버님 손에 이끌려 성당에 나가게 됐다. 이때부터 서양사람인 본당신부님이 나를 자주 유심히 쳐다 보셨다. 그당시 본당신부님은 스위스 사람으로 국내 유일의 스위스식 성당인 영천성당을 건립한 영천본당 초대주임 조신부님(빠리외방전교회)이셨다. 영천초등학교 5학년 무렵 그러니까 1936년 경에 나는 영세했다.
영세후 어느날 조신부님이 나를 따로 불러 『신학교에 가라』는 것이다. 신영세자이셨던 아버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때부터 본당회장님과 주위 어르신들은 나를 볼때마다 「신학교에 가라」고 권유했다. 나의 신학교 행을 권하는 분들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누님 부부도 계셨다. 어린 마음에 나는 「신학교가 무엇하는 곳인데 다들 이렇게 권하는가?」 의아해 했다.
잇따른 권유에도 내가 시큰둥해 하자 조신부님은 당시 영천본당 신학생이었던 고 박동준(마티아·부산교구·2001년 5월5일 선종)신부님까지 동원했다. 조신부님은 방학을 맞아 본당을 찾아온 박신부님께 『가브리엘 학생을 신학교에 보내고 싶은데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신학교 행을 권해보라는 특명(?)을 내리신 것.
박동준 신부님의 장황한(?) 설득에다 신학교 동기생이 된 고 장병보(베드로·대구대교구·1983년 선종) 신부님까지 『신학교에 같이 가자』고 부추기는(?) 바람에 나는 신학교를 가게 됐다. 1938년 열네살 어린 나이에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 예과에, 예비신학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이것은 영세한지 3년 이상이 되어야 신학교에 갈 수 있다는 관례를 깨뜨린 일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