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르포] 속죄의 사순,해방의 희년 - 서울 생명위 낙태 상처 치유 프로그램 ‘희망으로 가는 길’
생명을 지우는 낙태는 교회에서 금하는 무거운 죄이다. 하지만 우리가 회개와 속죄의 사순 시기 후 기쁨의 부활을 맞듯, 교회는 낙태 경험자가 고통과 죄의식에서 벗어나 앞으로 기쁨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생명의 소중함을 전하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 일환으로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이하 생명위)는 낙태 상처 치유 프로그램 및 미사 ‘희망으로 가는 길’을 주관하고 있다. 프로그램을 마친 참가자들은 “같은 아픔을 지닌 많은 이들이 이 시간을 통해 함께 치유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애도: “하느님 품에서 다시 하나 되길”
“사랑하는 엄마, 엄마와 내가 한 몸이었을 때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아요. 엄마의 자궁 속에서 나는 많은 걱정거리였어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정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아기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가 낭독되자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다섯 명의 참가자가 3부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을 함께했다. 1부 ‘자신을 돌아보기, 아기와의 화해’를 진행한 봉사자 이숙희(데레사·수원교구 평촌본당) 씨는 참가자들이 애도 시간에 충분히 머물 수 있도록 살폈다. 이 씨가 “다들 일상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다가도 ‘나 죄지었는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자꾸 들게 될 것”이라며 “그냥 묻어두고 눌러놓았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라고 설명하자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아기의 이름을 지은 뒤 화해와 용서의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졌다. 하트모양의 종이에 아기에게 쓴 편지는 3부인 미사 봉헌 시간에 촛불로 태워졌다.
생명위 담당 박진리 수녀(베리타스·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가 마련한 2부 ‘주님 안에 머무르기’에서는 명상과 함께 루카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읽고 나눴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입 맞추는 구절을 고른 정수미(가명) 씨는 “그동안 ‘아가들이 어디에서 떠돌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왔다”며 “오늘 강의 시간에 아가들이 고이 주님의 품 안에서 수호천사로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아이들이 입 맞춰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부분이 와닿았다는 이가은(가명) 씨는 “하느님이 얼마나 나를 불쌍하게 여기셨을까 생각이 들었다”며 “항상 주님이 인자로우셔서 지금도 나를 가엾게 생각하시며 많은 은총을 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하다”고 밝혔다.
3부에는 고해성사 후 생명위 사무국장 오석준 신부(레오) 주례의 미사가 계속됐다. 평화의 인사 시간에 참가자들은 마치 알던 사이인 것처럼 서로를 힘주어 안았다. 안주영(가명) 씨는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사이라 애틋했고, 그간 아팠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이 모두 끝난 후 진애주(가명) 씨는 “항상 죄인처럼 살면서 죄책감으로 말도 잘 못 하고 ‘내 아기들이 또 다른 어둠 속에 있지 않을까’라고 늘 생각했는데 오늘 하느님 품에 있다고 하니 너무 감사하고 기쁘다”며 “이곳으로 이끌어주신 하느님은 정말 너무 좋으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희망: 생명을 더하는 사람 되기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봉사자들과 담당자들은 ‘희망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아픔을 승화시켜 생명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봉사자 이 씨는 “나와 화해하고 나를 용서하면, 앞으로 행복하게 살고 상대에게 축복의 말을 해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며 “용서받음을 통해서 내가 또 다른 누군가를 용서를 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동안 어둠에 있어 들을 수 없었던 하느님의 희망과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 생명을 나누어 나의 말로 인해서 상대를 행복하게 만들 때, 나는 치유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애도 시간 충분히 가진 뒤 화해와 용서의 편지 적어
아픔을 희망으로 승화시켜 ‘생명 전하는 이’ 될 것 다짐
오 신부는 미사 강론에서 “못 다 준 사랑을 다른 아이에게 더 주겠다는 마음을 다짐하는 등 기쁨으로 가는 길을 하나씩 챙겨달라”며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희망과 생명을 말하듯 여러분도 아픔을 딛고 일어나 생명을 전파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박 수녀는 참가자들에게 낙태에 대해 언급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생명의 복음」 을 소개했다. “교회는 많은 경우에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무척 고통스럽고 거의 절망적이기도 한 결정이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며 “그 일은 분명히 엄청난 잘못이지만 실망에 굴복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권고한다”고 전했다. 또한 박 수녀는 “회칙은 여러분 자신의 고통스러운 체험의 결과로 여러분은 생명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지닌 권리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옹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고 밝혔다.
동행: ‘돌아온 탕자’ 보듬는 교회
우리나라는 모든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통한 낙태죄 용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낙태 경험자들이 고해성사의 은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고해와 보속 후에도 죄책감 속에 시달리고 있다. 오 신부는 “아픈 경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내 삶의 여정에서 함께 가는 동반자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며 “치유의 과정을 통해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이같이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얻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해방의 희년’일 것”이라고 말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처럼 모든 것 용서하시는 하느님
죄책감에서 해방으로 건너가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박 수녀는 “참가자들이 프로그램을 통해 기쁨을 얻고 자유로움을 느끼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길잃은 양을 돌보는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사랑을 느끼게 된다”며 “이 시간은 ‘그때’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마주하고 들여다봄으로써 떠나보낸 아기와 화해를 하는 기회”라고 덧붙였다. 봉사자 이 씨는 “많은 낙태 경험자들이 ‘나는 죄가 많으니까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 속에서 신앙생활을 기쁘게 못한다”며 “잘못한 부분을 분명히 아는 가운데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해 생명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시작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생명위는 낙태 상처 치유 프로그램 및 미사 ‘희망으로 가는 길’을 8월을 제외하고 매월 두 번째 화요일에 진행한다. 7월과 10월에는 직장인들이 참가하기 쉽게 두 번째 토요일에 마련된다. 프로그램과 미사는 오후 1시 30분~4시 30분까지 서울대교구 교구청별관 6층 소성당에서 이어지며,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사전 예약 등은 받지 않는다.
※ 문의 02-727-2353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