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전 부산교구장 이갑수 주교 (2)

정리=최홍국 기자
입력일 2002-12-22 수정일 2002-12-22 발행일 2002-12-22 제 2328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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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 엄한 신학교 생활이 좋아
‘절대 스스로 나가지 않겠다’다짐
대구 유스티노신학교에는 고 장병보(베드로) 신부님과 함께 입학했다. 우리는 당시 대구-영천간을 하루 한번만 다니는 버스를 타고 대구 남산동 유스티노신학교를 찾아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유스티노신학교 교장 엄신부님(파리외방전교회)은 같이 간 장신부님이 나의 학부모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사실 장신부님은 나보다 두 살 연상이면서 나이들어 보이는 탓도 있지만 내가 워낙 어려보이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장병보 신부님은 본당신부님께 일찍부터 신학교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신학교행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장신부님은 나보다 세례도 1년 먼저 받았고 초등학교도 2년 먼저 졸업한 후 당시 영천경찰서 앞 포목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천본당 주임 조신부님의 지시로 신학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후 나와 함께 유스티노신학교에서 2년간의 준비 끝에 동성상업학교(소신학교)로 진학할 때는 나보다 1년 윗반으로 진학하고 사제품도 나보다 1년 먼저 받았다.

유스티노신학교 생활은 신학생으로서 갖춰야 할 품성교육과 함께 무엇보다 당시 꽤 까다로왔던 중학교 진학시험을 준비시키는 예비과 과정이었다. 2년 과정을 마치고 열여섯 살 되던 해 그러니까 1938년 4월 5일 서울 동성상업학교에 정식 입학했다.

먼저 밝혔듯이 나는 특별한 동기없이 주위의 권유로 신학교에 들어갔다. 일단 신학교에 입학한 후 밤에는 침묵을 지켜야 하는 등 규칙이 엄한 신학교 생활이 좋아졌다. 동시에 일단 신학교에 들어왔으니까 「스스로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됐다. 공부를 못하거나 행실이 나쁠 때 신학교에서 쫓겨나는데 나는 공부는 잘한 편이라 걱정이 없었고 혹시 잘못된 행동으로 신학교를 쫓겨나는 대열에 낄까봐 은근히 걱정하기도 했다.

동성학교 진학후 먹는 것 입는 것은 물론 교모, 구두까지 지급받으니까 우선 기분이 좋았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신학교 생활중 떠오르는 추억은 기도와 고해성사 거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5년제인 소신학교 때나 대신학교 진학후에도 신학교 규칙은 똑같은데 저녁식사 전 15분 동안 성체조배 시간은 고민되는 시간이었다. 매일 똑같은 생활속에서 『오늘은 성체앞에서 예수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나』걱정이었다. 더불어 매주 토요일 점심식사후의 고해성사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고해성사 단골메뉴로는 「침묵시간에 침묵을 깼습니다」, 「애들하고 말다툼 했습니다」, 「게으름을 피워 늦게 일어났습니다」정도로 없는 「죄」를 만들어 고백할 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해거리가 없습니다. 강복주십시오」라고 얘기하면 되었을 것을….

1950년 10월 28일 부제품을 받은 필자(오른쪽). 이때 고 장병보 신부(앉은 이)는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4~5학년 무렵의 일이다. 당시는 일제 말기 배급제라 먹는 것이 부족해 항상 배가 고팠다.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신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시기에 주일 오후 자유시간을 기해 신학교 인근에 친정(집)이 있는 신학생을 따라가서 쌀을 얻어다가 산에 올라가 밥해 먹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하루 세끼 조금의 미역이나 해초류로 국을 끓여먹는 것이 다반사였던 신학교 생활이라 산위에서의 쌀밥은 정말 기가 막히게 맛나는 최상의 음식이었다.

또하나, 소신학교 시절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제주도 즉 남부지방 신학생 지도 송신부님(전주교구 소속)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은 일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성격이 꽤 괄괄했었다. 집에서 약을 먹이더라도 형님, 누나들이 내 팔다리 하나씩을 붙잡고서야 먹일 수 있었지 어머님 혼자서는 도저히 약을 먹일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동성학교 진학 첫해 1학년 시절 어느날 운동장에서 동급생들과 한창 열심히 뛰놀던 모습을 지켜본 송신부님이 나를 불러 『네가 공부 좀 잘한다고 다들 귀여워 해 주고 하니까 뵈는게 없느냐』며 호되게 야단맞은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마 내가 많이 까불었던(?) 것 같다. 최근까지도 동안(童顔)이라 불릴 정도로 얼굴이 반반하고 이쁜(?) 덕에 주위 어르신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던 것이 사실이니까. 이 후 나는 기가 죽어 평생을 조용하게 지내온 셈이다. 어린 마음에 송신부님의 꾸중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아마 이때 경험이 나에게는 필요했던 질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리=최홍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