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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인간적인 면모 - 최석우 신부(사제성화의 날 강연 초)

입력일 2012-03-19 수정일 2012-03-19 발행일 1996-06-23 제 200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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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때부터 반백…키 크고 허약체질 
라틴어 실력 수준급, 역사ㆍ지리에 해박
“한국 교회 다시 젊어져야 할 때”
김대건 신부는 10대 때부터 「반백」(半白)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 1백50주년을 맞아 성인에 대한 사료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김 신부의 인간적인 면면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김대건 신부 전기 자료집 간행을 서두르고 있는 한국 교회사 연구소장 최석우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스승 리브와(Libois)신부를 비롯한 조선 신자들의 증언, 그리고 김 신부 자신의 서한들 기초로 김 신부의 인간적인 측면들을 종합한 자료를 6월14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사제성화의 날 행사 때 공식 발표해 사제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다음은 최석우 신부가 사제성화의 날에 발표한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대한 추상적이고 너무 거룩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로 인간적이고 보통 사제적인 이야기를 오늘 하고자 한다. 그것은 김대건 신부가 인간적으로 또는 사제적으로 우리와 먼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음을 강조하고 친밀감을 느끼게 하려는데 있다.

■ 김대건 신부는 늘 허약했다

흔히 김대건 신부가 최양업 신부보다 언어 능력이 뛰어나 프랑스 함대를 타고 먼저 귀국길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대건의 스승 리브와 신부의 서한을 보면 『그간 저도 1842년 프랑스 군함 2척으로 김 안드레아와 최 토마스가 귀국길에 오르게 될 때 안드레아가 토마스보다 먼저 군함에 오르게 된 것이 다름 아닌 약한 건강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가 그의 건강으로 늘 고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839년 5월16일자로 필리핀 롤롬보이에서 쓴 리브와 신부의 서한을 보면 『김대건은 복통과 두통, 요통을 자주 앓고 있으며 마카오에서 칠면조 집 대들보를 들어올린 이후 허리병도 앓고 있다』고 적고 있다.

1839년 6월6일자와 6월23일자 리브와 신부의 서한을 종합하면 『김대건은 꽃병을 가슴 위에 옮겨놓고 옮겨야 할 정도로 허리가 아프고 자주 가슴병을 앓고 있으며 소화도 잘 못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몸이 불편한 것은 성장 발육에서 오는 것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밝히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상당히 키가 큰 것으로 짐작된다.

리브와 신부는 『김대건 신부는 매우 키가 크다』고 적고 있고 1880년대 조선 신자들도 『김 신부는 허우대가 좋고 튼튼한 체격에 키가 컸고 품격 있는 얼굴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리브와 신부는 또 『그의 머리는 벌써 희끗희끗해졌습니다. 저는 일찍이 젊은이에게서 이렇게 반백이 된 머리카락을 본적이 없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의 서한에서도 자신의 병약한 모습이 자주 드러나고 있다.

1845년 3월27일자 김대건 신부의 서한에는 『오장육부가 끊어져 버릴 듯 가슴과 배와 허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히 아팠으며 보름 넘게 앓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1845년 4월7일자 서한에서 김대건 신부는 『지금 눈병을 앓고 있으며 할 일은 태산같이 많은데 몸이 허약하기 짝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다.

■ 김대건 신부의 라틴어 실력

최석우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라틴어 실력을 김 신부의 라틴어 서한을 판독한 동성중학교 교장 최승룡 신부의 말을 빌어 적고 있다.

『대단한 인내와 고행길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대건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성덕에 감복되었다기보다 그분들의 라틴어 문장에 완전히 매료됐기 때문이다』

일례로 김대건 신부의 항해에 관한 편지에서 큰 배, 전함, 나룻배, 종선 등 배에 관한 30여 개의 라틴어 단어들이 나올 정도로 풍부한 어휘 능력을 갖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의 스승이며 조선 선교사였던 매스트로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김 안드레아가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직접 쓴 것입니다. 제 기억에 한두 군데 밖에 고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 김대건 신부의 역사의식

김대건신부는 역사 지리에 대한 해박하였다. 1844년 훈천-경원 기행문과 조선전도 작성, 세계지도 번역, 지리 개설서 편찬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관장이 그에게 사형 선고문을 읽어 주면서 『외국인과 연락을 가졌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린다』고 하자 김대건 신부는 『내가 외국인들과 연락을 취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 내 천주를 위해서였다』고 분명히 밝혀 선고문을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이 정치적 이유가 아닌 참된 신앙의 증거였음』을 분명히 했다.

■ 김대건 신부 순교의 의의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대변한 순교이다. 만약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가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 사제들의 체면과 위신은 어떠했을까?

역사는 병오박해가 소박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그것을 대박해로 간주했다. 그것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 때문이었다.

김대건 신부 순교 1백50주년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젊어져야 한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벌써 「조로」(早老)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증거는 무엇보다도 그간의 놀라웠던 발전이 갑작스레 둔화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조로는 조숙(早熟)의 필연적 결과인지 모른다.

어쨌든 한국교회는 다시 젊어져야 한다. 우리 사제들은 김대건 성인을 본받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젊어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평신도들도 다시 젊어질 수 있을 것이고 우리 한국교회도 젊음을 되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