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 권유한 동생에게 변함없는 믿음 밝혀 천진암 강학회 통해 천주교 교리 접해 우리나라 첫 세례자… 45세 때 참수
중국에 간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성물과 교리서를 가지고 귀국했다. 또 이벽과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고 동료들과 서울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토마스)의 집에 모여 주일을 지키고 교리를 전했다. 그러나 1785년 3월 이 모임이 관헌에 발각돼 해산되고 말았다. 양반이었던 이승훈은 별다른 형벌 없이 귀가했지만, 문중과 유림의 핍박을 받게 됐다. 이승훈의 부친은 문중대표들과 가족이 보는 앞에서 이승훈이 지녔던 모든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게 했다.
이승훈은 가족과 문중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일 모임을 이어나갔다. 아직 교회법에 밝지 못했던 이승훈과 초기교회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임시로 성직제도를 만들어 전례를 거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1789년 베이징교회에 파견한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통해 임시로 만든 성직제도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사제파견을 요청했고, 마침내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입국시키는데 성공했다. 선교사를 입국시킨 기쁨도 잠시 1801년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교회의 지도자였던 이승훈 역시 체포돼 매일 같이 고문을 당했다. 박해자들은 교회지도자 중 배교선언을 한 이들은 처형하지 않고 귀양을 보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배교의 말을 했다고 허위기록을 하고 허위조작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즉시 처형했다. 이승훈의 경우도 배교선언을 했다고 기록돼있지만 처형됐다. 이승훈이 신자들뿐 아니라 선비들 사이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배교 소문이 천주교 세력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서소문에서 처형을 당하기 전 동생 이치훈은 이승훈에게 “천주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다니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우선 목숨을 보전하고 보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고, 물은 치솟아도 못이 마르면 다한다”고 말해 자신의 신앙은 변함없고 박해는 결국 그칠 것임을 말하며 1801년 4월 8일 45세의 나이로 참수당했다.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