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쉽게 저지르는 죄가 뭔지 아세요?”
아흔을 바라보는 노수녀의 말을 듣는 순간, 속으로 뜨끔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그렇게 물음을 던진 조성애 수녀(87·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의 눈길은 먼 하늘 어딘가를 더듬는 듯했다. 밀려가는 구름의 자취를 좇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낸 하늘길을 따라가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결국 그의 모든 말마디는 ‘사형수’에게로 모였다.
조 수녀는 ‘사형수들의 대모’ ‘사형수들의 어머니’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눈길이 좇은 하늘가에는 그간 만나고 떠나보내야 했던 사형수들의 얼굴이 점점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좋은 데 갔겠지…. 주님이 사랑하셨으니, 사랑 많이 받았으니….”
노수녀는 계속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혼자서 되뇌었다.
조 수녀가 교정사목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건 1976년, 편지로 옥중의 재소자들과 상담을 주고받으면서부터였다.
“벌써 그렇게 됐어요?”
오히려 기자에게 되묻는다. 희미해진 기억의 파편 속을 헤집고 근근이 찾아낸 자투리 기억들은 애써 떨쳐버리려던 아픔을 되살려냈다. 노수녀가 손으로 눈물을 찍어낸다.
꼬박 40년 넘는 세월 동안 조 수녀가 돌봐온 사형수들만 20명을 훌쩍 넘는다. 그로 인해 하느님을 알게 된 재소자와 교정공무원만도 800명이 넘는다.
한동안 하늘가를 오가던 조 수녀의 마음이 땅으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참 몰라요,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깊고 큰지….”
노수녀는 ‘교만’(superbia)에서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짓고 있는 죄의 뿌리를 찾았다.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의 모상’(Imago Dei)대로 지어졌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우리 모두는 존엄하신 하느님의 모상을 품고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 어떤 누구도 하느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아요.”
조 수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기’만 존귀하고 ‘타인’은 자기보다 덜하다거나, 아예 어떤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없다고 여겨요. 그렇게 여김을 당하는 사람에게 내재해 계신 하느님께서 그런 모습을 보신다면…, 기가 차지 않으실까요.”
40년 넘는 세월 동안 조 수녀가 만나 온 이들은 대부분 주위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조 수녀가 만나는 이들을 ‘개돼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죽여도 싼’ 인간들을 왜 도와주느냐고 욕도 적잖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조 수녀의 마음이 먼저 무너져 내렸다.
감정을 주체하느라 가슴을 누르고 있던 손을 뗀 조 수녀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우리는 당해보지 않고 겪어보지도 않고…, 너무 쉽게 나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재단해요. 그런 모습이 하느님께 상처를 드리는 죄라는 사실도 모르고…, 너무 쉽게 죄를 지어요.”
노수녀는 그간 만나 온 사형수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OOO 형제는 손이 복슬복슬하고 참 예뻤는데….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뭘 하고 있으려나….”
형제들에 대한 추억은 그를 청춘시절로 다시 돌려보냈다. 신이 살아났다.
“사방이 깜깜한데 새벽 두세 시면 수녀원을 나섰지요. 어떻게 그때는 세상 무서운지도 몰랐는지…. 한밤중에야 겨우 되짚어 돌아와서는 그대로 고꾸라지곤 했었지요.”
지방에 있는 교정시설로 이감된 ‘형제’를 면회하러 가는 길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대전 공주 원주 청주 마산 등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교정시설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사형수들을 만나러 다니다보니 언제부터인지 ‘사형수들의 대모’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형제들과의 만남을 떠올릴 때 그의 얼굴은 모처럼 환하게 빛났다.
노수녀가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지금껏 잊지 않는 일, 아니 그치지 못하는 일이 있다. 사형수와 범죄피해자 가족들을 돌보는 일이다. 누구도 하지 않는 일, 관심조차 두지 않는 일이었다. 오히려 드러났다가는 안 좋은 소리 듣기 십상인 일이었다. 특별히 조 수녀는 교육을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교육이 너무나 중요해요. 어느 형제는 어머니는 시각장애인,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었어요. 네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갔어요. 큰형은 정신질환이 있었고, 아버지는 음독자살을 해 조부모 밑에서 자랐어요. 눈이 너무 나빠서 수십 번 취직을 해도 가는 곳마다 금방 쫓겨나고…. 1991년 세상에 대한 분풀이로 차를 몰고 여의도광장을 질주했어요. 23명이 죽거나 다쳤지요. 사형 선고를 받고 예쁘게 살았는데…. 1997년 겨울 결국 사형을 당했어요.”
그 형제가 쓴 자서전은 공지영 작가에게 건네졌고,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밑거름이 됐다.
지금도 조 수녀는 사형수와 범죄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2003년 유영철의 손에 노모와 아내, 4대독자 등 온 가족을 잃고도 그를 위한 탄원서를 내 세간을 놀라게 했던 고정원(루치아노·75)씨를 주님께로 이끈 이도 바로 그다.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마세요. 그건 주님을 제 마음대로 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이 아니죠. 자신이 누굴 믿고 누굴 따르고 있는지,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인지 돌아보길 바랍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은 숨을 들이쉰 노수녀의 눈길은 다시 하늘가로 옮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