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살면서 좋았던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신부가 외국에 살면 뭐가 좋지? 생각해보면 아주 쉬운 답이 떠오른다. 바로 작은 것에서 얻는 기쁨과 뿌듯함이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한국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아주 큰 기쁨을 느끼는 거룩한 사제들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미사를 봉헌했다는 것 외에 다른 감동을 느끼기 쉽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고, 세상에서 일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에 비하면 크게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강론을 쓰지 않는다면 더더욱이나….
그런데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작은 것 하나하나가 모험이었고, 도전이었다. 긴 복음을 선포할 때면, 발음이 꼬이지 않으려고 수십 번을 연습해야 했고, 일 년에 한두 번 읽는 대축일 감사송을 읽으려면 부담이 됐다. 처음에 차 축복이나 집 축복은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처음 사람들 앞에서 식사 전 기도를 할 때도 정말 큰 산을 눈앞에 둔 것 같았다. 앞으로 첫영성체 하는 아이들에게 기도문 못 외운다고 구박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정도였다.
이러니 그것을 해내고 난 뒤에 기분이 어떠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마치 17대 1의 싸움을 멋지게 싸워 이긴 것 같은 폼을 잡고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혼자서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도 난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 기쁨을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은 참으로 빨리 움직이고, 그래서 해야 할 것도 참으로 많다. 그러다 보니 삶에서 나오는 소소한 기쁨을 찾기가 어렵다. 예를 들면 아이가 처음 걸을 때 박수치며 기뻐했고, 처음 “엄마, 아빠”를 말했을 때는 ‘내 아이가 100년에 한번 나오는 천재인 것 같아’하며 기뻐하고 행복해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를 볶아대며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할 특전사로 키우게 된다. 그러니 기쁨보다 키우는 고생과 전쟁이 더 많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분명 제자들과 함께 배에 있었다. 피곤하셨는지 배 한 쪽에서 잠이 드셨다. 풍랑에 배가 크게 흔들렸지만 깨지 않으셨던 것을 보면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으셨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풍랑과 큰 파도 앞에서 곧 두려움에 빠져버렸다. 방금 전 큰 기적을 보여주신 분이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기적은 쉽게 믿으면서 주님께서 함께 있다는 것에서는 그들의 믿음이 발휘되지 못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사는 기쁨, 가족과 친구, 이웃과 함께 사는 소소한 곳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다면 매번 기적과 같은 일을 찾아다니는 수고로움을 겪어야 할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자. 늘 작은 이들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신 주님께서는 작은 곳, 그 곳곳에 분명 당신의 기쁨을 숨겨두셨을 것이다.
글 _ 문석훈 베드로 신부(교구 비서실장)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