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

박지순
입력일 2024-12-11 수정일 2024-12-17 발행일 2024-12-25 제 3422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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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다음날 봉쇄수녀원 미사가 있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터였다. 막 잠이 들려던 찰나 전화가 울렸다. 국제 행사 때 알게 된 미국인 신부의 전화였다. ‘무슨 일이지?’ 하며 받았다. “바오로, 괜찮아? 넌 안전한 거야?”, “응? 무슨 말이야?”, “야, 너네 나라 계엄령 떨어졌어!” 서둘러 TV를 켰고, 이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됐다. ‘세상에, 21세기에 계엄령이라니!'

이후에 일어난 일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계엄군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190명의 국회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 모여 만장일치로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대통령은 6시간 만에 비상계엄을 해제했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이 거세지는 가운데 탄핵소추안이 발의됐지만 여당 의원들 대부분이 집단 퇴장하면서 탄핵소추안은 의결정족수보다 적은 인원이 표결에 참여해 폐기됐다. 국회 앞에 모여 있던 수많은 시민들은 민의를 대표해야 할 여당 국회의원들이 자기 당의 이익을 민의에 우선하는 모습을 목도했다. 국내 언론뿐 아니라 국외 언론들조차도 비판한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다음 주간에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내란상시특검법’이 통과됐고,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대통령이 특전사령관에게 여러 차례 전화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통령 본인이 비상계엄을 직접 지휘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한편 여당에서도 탄핵에 동조하는 의원들이 늘어났고, 마침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2016년 12월 9일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 8년 만이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한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내리는 결정을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 강산이 한번 바뀌기도 전에 또다시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도 국무총리가 여당 대표와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비헌법적인 소리를 듣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당장의 이익과 권력에 눈이 멀어 자기들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으니 망정이지, 나라가 가라앉는 모습을 눈 뜨고 바라만 보게 될 뻔했다는 사실을 곱씹을 때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다.

대통령과 국무위원들, 군 장성들, 여당 국회의원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비이성적일 수 있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국민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의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국회에 나와 증언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역사 지식과 인식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이루어냈는지 공부도 하지 않고 성찰도 하지 않으니, 권력을 차지한 자신들은 국민들 위에 있다는 착각이 삶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드러났을 뿐이다.

이들과는 달리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시민들은 비상계엄 선포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앞다투어 국회로 달려왔다. 날마다 국회 앞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던 시민들 가운데에는 특히 각종 미디어에서 ‘개인주의’의 화신처럼 묘사되던 소위 MZ세대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들의 존재 덕분일까? 비장한 구호와 민중가요 일색이던 예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집회 장면은 신선함을 주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성숙하고 여유롭게 국가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모습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해 어떤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 왔는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회자되곤 했다. 근래 몇 주 동안 우리가 세상에 보여준 모습은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역사를 지나간 과거로 흘려보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뿌리로 인식하는 시민이 굳건히 존재하는 한, 이 땅의 민주주의 또한 굳건히 존재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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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