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 피아니스트 백건우(요셉마리)

정리 성슬기 chiara@catimes.krrn사진 최용택
입력일 2017-09-26 수정일 2017-09-27 발행일 2017-10-01 제 3064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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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보편적 언어”
“인간의 힘만으로 안 되는게 음악”
 하느님의 힘 존재하는 것 느껴 
무대 오르기 전에 꼭 기도하며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연주
세계적 명성 “주님 이끄심 덕분”
성가 뿐 아니라 모든 음악에 신앙·삶·인간성 모두 녹아 있어
클래식, 마음 움직일 수 있는 음악
처음 듣는 이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삶의 의미도 발견할 수 있어
고정관념 깨고 다가갈 수 있도록 청중 설득하는 것은 연주가의 몫

음악은 신앙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한 신앙은 음악에 어떤 힘을 더해줄까. ‘세기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백건우(요셉마리)씨는 삶의 모든 순간, 신앙과 아내, 그리고 음악이 있어 든든하다고 말한다. 지난 4월부터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국 순회연주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10월 14일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있는 백씨를 본지 장병일 편집국장이 만났다. 이날 만남에서는 신앙과 음악,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야말로 구도하는 마음으로 갈고 닦는 그의 깊은 내면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한평생 또한 매 순간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신앙과 예술을 공유해온 아내, 배우 윤정희(소화 데레사)씨도 동행했다.

■ 대담 : 장병일 편집국장

“무대에 오르기 전이면, 이 무대를 완성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 달라는 기도를 늘 한다”고 말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씨.

좌측
▲장병일 편집국장(이하 장 국장) : 60년 넘게 피아니스트라는 외길을 걸어오셨습니다. 혹자는 선생님을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다소 철학적이며 신앙적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음악인으로서, 피아노 연주가로서 살아온 삶의 여정을 회고하신다면.

-피아니스트 백건우 (이하 백건우) : 피아니스트의 삶은 선택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하다보면 하느님의 힘이 존재한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작곡가가 곡을 쓰고 연주가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등 모든 음악이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특히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는 건 인간을 뛰어 넘는 어떤 힘이 뒷받침 해주는 덕분이지요.

▲장 국장 : ‘건반위의 구도자’란 말의 의미는 ‘깨달음을 구하는 자’로 통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깨달음이란 ‘하느님 말씀을 완전히 체득’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백건우 : 본질에 충실한 사람이면 누구나 구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 본질적인 목소리를 찾는 것인데, 모든 예술가는 본질을 추구하고 싶어 하거든요. 저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본질은 ‘신앙’이겠죠.

▲장 국장 : 음악과 종교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바로크 시대의 거장 바흐나 헨델과 같은 유명 음악인들도 신앙심이 깊었고, 그들의 음악 영역에서 신앙이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앙이 백 선생님의 음악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또 끼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백건우 : 음악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언어라고도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보기에는 ‘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꼭 기도합니다. ‘오늘 이 무대를 내 힘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으니 하느님께서 끝날 때까지 도와 달라’고 말이죠. 늘 성수와 십자가를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모든 곡을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

▲장 국장 : 곡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일 듯 한데요. 신앙의 절대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선(善)과 정의를 주로 다루실 것 같기도 한데요.

-백건우 : 예술은 선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내용처럼 음악에 악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다만 연주자가 선택을 하는 것이죠. 선만 다룰 수 있다면 그것은 음악으로서 완벽하진 않을 겁니다. 절대자에 따르는 해석도 하지만 때론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인간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장 국장 : 흔히들 피아노 연주는 테크닉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곡을 해석하고 연주하는 데에는 신앙과 철학이 더해져야 진정한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백건우 : 위대한 예술가와 그냥 피아니스트의 다른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냥 피아노를 잘 치면 피아니스트, 단순한 연주를 넘어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깨달으면 음악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음악을 초월해 그 이상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지요. 실제 음악을 깨닫지 못하는 음악인들도 굉장히 많답니다.

▲장 국장 : 가톨릭 성가 연주는 하지 않는 걸로 압니다.

-백건우 : 하지만 모든 음악에 신앙과 삶, 인간성이 다 녹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 13번 2악장이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부모의 아픔을 위로하는 곡인데요, 베토벤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노래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모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베토벤의 마음은 성스럽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세월호 참사 추모공연 때 제가 그 곡을 연주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백건우 : 하지만 모든 음악에 신앙과 삶, 인간성이 다 녹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 13번 2악장이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부모의 아픔을 위로하는 곡인데요, 베토벤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노래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모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베토벤의 마음은 성스럽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세월호 참사 추모공연 때 제가 그 곡을 연주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백건우씨와 장병일 본지 편집국장, 배우 윤정희(왼쪽부터)씨가 ‘삶의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신앙’에 관해 대화하고 있다.

▲장 국장 : 선생님께서는 권위 있는 상을 여러 차례 받으면서 세계적인 음악예술가로 인정받으셨는데요. 이러한 눈부신 성과와 좋은 평가의 근원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백건우 : 부끄럽습니다. 제가 한게 아니라, 주님 이끄심 덕분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 연주가 아직도 제 귀에는 서툴게 들리고 만족스럽지 못하죠.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아 ‘다음번에는 조금 더 잘해봐야지’ 하는 생각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음악이라는 세계를 인간의 힘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연주를 하면서 놀랍고 환희를 느낄 때가 있지만 아직 무언가를 완전히 깨달았다고 할 순 없죠. 그래도 모든 것에는 일방통행이 없는 거 같아요.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그것이 다시 내게로 오지요. 이렇게 계속 연주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쏟아 붓는 만큼 음악도 늘 무언가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뜨고 귀도 기울이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그런데 요즘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장 국장 : 최근 클래식 연주가들이 점차 대중가요 쪽으로, 조금은 가벼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추세도 있는데요. 대중과 함께 호흡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클래식의 본질이 흐려질까 한편으론 염려스럽습니다.

-백건우 : 클래식은 대중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클래식만큼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음악이 없거든요. 클래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다가가는 것은 연주가들의 몫이지요. 우리가 곡에 완전히 설득된 상태에서 연주를 해야 청중을 설득할 수 있는 겁니다. 음악은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전 세계로 연주를 다니면서 음악이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클래식을 처음 듣는 사람도 누구나 음악을 즐길 수 있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장 국장 : 연주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려면 건강관리도 소홀해선 안 되겠습니다.

-백건우 : 건강해야 합니다. 음악회를 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해요. 무대 위에서 단순히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거든요. 같은 곡이라도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연주가 전에 없던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데, 쉽지가 않죠. 어떤 예술가는 무대는 하나의 작은 죽음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만큼 무대에서 자기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말입니다.

▲장 국장 : 프랑스에서 생활하시면서 연주 때마다 한국을 방문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국내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현재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보십니까.

-백건우 : 한 사회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도 할 수 있죠. 어느 한 쪽의 의견만 있으면 반 밖에 이뤄지지 않는 것이죠.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음악이라고 해서 과거를 잘라낼 수는 없어요. 그 저변에는 음악의 바탕이 있는 거잖아요. 뿌리 없는 음악은 금방 죽고 맙니다. 나무가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는 것이죠. 사실 너무나도 간단한 진리인데 많은 이들이 자꾸 간과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장 국장 : 지난 9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10년 만에 베토벤 전 곡을 연주하셨고, 이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국 순회연주 대장정의 마지막 순서로 10월 14일 수원 SK아트리움 공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삶과 연주 계획도 궁금합니다.

-백건우 : 국내에서 공동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습니다. 올해는 경기·대전·대구·안동·울산·부여 등 전국에서 연주한다는 면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음에는 좀 더 발전시켜 지역을 가리지 않고 큰 하나의 주제로 연주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문화를 넘어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섬마을에 가서 음악회를 하는 것도 같은 의미지요. 그곳에서 처음 피아노 연주를 듣는 이들도 누구보다 음악을 잘 이해하거든요.

더 좋은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아량과 서로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요, 일본이나 중국에서 공연을 해보면 지역에 상관없이 함께 힘을 모아 공동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합니다.

공연기획사 빈체로 제공

■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10살 나이에 첫 콘서트를 열었다. 미국 줄리아드 스쿨과 런던 등지에서 수학하고 로지나 레빈 등 피아니스트의 위대한 전통을 잇고 있는 거장들을 사사했다. 1969년 세계적 권위의 부조니 콩쿠르에서 골드 메달을 받았고, 1972년 뉴욕에서 모리스 조세프 라벨의 독주곡 전곡을 연주했다. 이후 세계 각지에서 독주를 비롯해 유명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등을 이어왔다.

특히 프란츠 리스트의 솔로 작품으로 구성한 음악 이벤트는 “가슴 속 깊은 곳으로 청중을 끌어들여 그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는 불가사의한 여행과도 같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1992년과 1993년 연이어 유럽 최고의 음악상인 디아파종 상을 수상했으며, 동시에 프랑스 3대 음반상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예공로훈장인 ‘슈발리에’를 받았고, 호암재단으로부터 ‘호암 예술상’을 받았다. 같은 해 중국 정부로부터 초청받은 최초 한국 연주자이기도 하다. 2013년 한국 ‘섬마을 콘서트’ 투어로 큰 화제를 모았고, 2014년엔 ‘세월호 사고 100일 추모공연–백건우의 영혼을 위한 소나타’로 전 국민의 뜨거운 성원을 받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면서 연주에 전념하고 있다.

정리 성슬기 chiara@catimes.krrn사진 최용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