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세(敎勢)란 종교의 형세 또는 그 세력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일목요연하게 교세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교세통계표이다. 따라서 교세의 현황을 파악하고 분석 진단하는데 있어 교세통계표는 필요불가결한 기초 자료이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매년 연말기준으로 작성 발표하고 있는 「한국천주교회 교세통계」를 참조, 80년대 한국교회 교세를 진단해 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10년 주기가 비교적 중장기적 변화를 측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50년대 10년과 80년대 10년을 수치상으로만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사회변동이 갈수록 급격히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세와 정치 경제 사회 제반 현상은 밀접한 함수관계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가톨릭의 역사는 2백년이 넘지만 전반기 1백년은 박해로 인해 교세신장 보다는 존립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신교(信敎)자유 획득 이후에도 일제식민지 치하, 8ㆍ15해방, 6ㆍ25동란 등은 교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왔다.
교세의 구성은 인적 자원과 시설 자원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인적 자원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항목은 신자총수이다. 신자총수는 곧 교세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6ㆍ25동란 휴전협정후인 1953년 신자총수는 16만6천4백71명이다. 물론 박해시대에도 선교사들은 신자수를 비롯한 교세전반을 파악, 본부에 매년 보고서를 보내곤 하였다.
그러나 1953년 집계 신자총수는 남북분단 이후 처음 집계한 남한교회만의 교세이며 현재와 같은 교세통계 작성표에 입각한 교세통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1950년대 교세기준은 1953년부터 시작된다.
한국가톨릭의 교세는 결국통계상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50년대 신자 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증가율을 나타냈다. 53년에 첫 신자총수 통계가 잡힌 후 59년까지 50년대는 7년 동안 신자수가 무려 1백50%나 늘어났다.
60년대 신자 증가율은 86ㆍ78%, 그리고 비교적 침체기였던 70년대 신자증가율은 60%였다. 반면에 80년대는 88년 12월말 현재(1989년 12월말 현재 교세통계는 90년 2월말쯤 집게 가능) 9년 동안 98%의 신자 증가율을 기록했다. 금년 한 해 동안 신자 증가수가 지난해 수준만 유지한다 하더라도 80년대 신자 증가율은 배가 넘는 1백10%선에 달한다.
신자총수에 근거한 80년대 교세는 50년대에 비해서는 증가율에 있어 다소 뒤지고 있으나 60년대, 70년대에 비해서는 월등히 높은 신장율을 나타냈다. 특히 70년대와 비교하면 약 2배에 가까운 증가율이다.
50년대 7년간 연평균 신자증가율은 무려 20%선에 달하고 있으나, 신자 증가수는 3만5천여 명 수준이다. 그 반면 80년대 후반 연평균신자 증가율은 7%선이지만 증가수는 5배에 가까운 15만 명 선이다. 특히 80년대 후반에 이룩한 연평균신자 증가총수 15만 명 선은 1953년 전국신자 총수와 버금가는 규모이다.
이같이 신자 증가율은 해가 갈수록 전년도 수준을 유지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실수 증가가 지난해와 같은 수준을 유지하더라도 증가율은 오히려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할 때 80년대 신자 증가율이 60년대, 70년대 신자 증가율을 상회한 것은 엄청난 신자 증가를 쉽게 알 수 있다.
70년대가 격동과 진통 속에서도 어렵게 성장해왔다면 80년대는 성자의 분수령을 이룩한 10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그만큼 80년대는 신자 증가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하였기 때문이다.
80년대 9년 동안 증가한 신자 총수는 1백22만1천8백14명. 70년대에 비해 98%, 즉 배로 늘어났다. 다시 말하면 전체 신자 가운데 2명중 1명은 80년대에 영세 입교한 신자이다. 금년말 현재 통계가 집계되면 80년대 신자비율은 이보다 더 높아지게 된다. 이것이 80년대 교세의 특성이라고 규정해도 좋을 것이다.
80년대의 높은 교세 신장은 70년대에 어렵게 이룩해놓은 1백만 신자 돌파의 바탕위에서 사회경제 발전과 더불어 본당들의 재정자립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70년대 초반은 60년대 말부터 현저히 나타나기 시작한 인구의 도시집중화 등으로 신자들의 도시집중 역시 심해지면서 교적 미정리자가 늘어나 이른바 「거주 불명자」가 양산되었다. 이로 인해 70년대 초반 한때는 신자증가율이 인구의 자연증가율에 못미처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에 주교회의는 73년도부터 거주불명자도 교세통계상 신자수에 포함시켜 88년12월말 현재 거주불명 신자수는 신자총수의 13.1%에 달하는 32만3천3백6명으로서 오히려 냉담자수를 훨씬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주불명자와 함께 교세통계상 암적 요소라 할 수 있는 냉담자수는 88년12월말 현재 신자총수의 10.26%인 25만3천2백18명에 달한다. 거주 불명자와 냉담자를 합친 비율은 23.36%에 달한다. 그러나 이 비율은 70년대 말에 비해 실수는 늘었으나 비율은 각각 낮아져서 고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거주불명자와 냉담자 비율이 높은 현상은 50년대6ㆍ25사변 후 소위 구호물자라는 물질적인 혜택으로 대거 입교한 신자들이 60년대 중반이후부터 교회에서 베푸는 물질적인 혜택이 없어지고 오히려 헌금정신이 강조되자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에 들어 신자 양산 체제하에서도 거주불명자와 냉담자 비율이 소폭이나마 줄어들고 있는 것은 이를 잘 입증해주는 셈이다.
냉담자 및 거주불명자 문제는 도시집중화 현상의 소산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도시집중화 현상은 교구별 전출입자 통계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70년대 말에는 서울ㆍ인천ㆍ부산 등 3개 교구만이 전입자가 전출자보다 많았을 뿐 나머지 11개 교구는 모두 전출자가 전입자보다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80년대에 들어 더욱 심화돼 88년 12월말 현재 전입자가 전출자보다 많은 교구는 서울과 수원 단 두 교구뿐이다. 70년대에 비해 인천ㆍ부산교구의 전출자가 전입자보다 많아진 반면 수원교구는 전입자가 전출자수보다 많아졌다. 이 같은 현상은 사회경제적 측면의 인구이동 현상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춘천 대전 원주 안동 전주교구 등은 전출자가 전입자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으며 특히 원주교구의 경우는 전출자가 전입자보다 약 9배나 많은 기현상을 보여주면서 원주교구 교세성장의 암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같은 결과 전국신자 대비 서울교구 신자 수는 79년 말 28.06%에서 매년 증가, 88년 말 현재 34.76%에 달하고 있다.
거주불명자는 도시집중화에 따라 70년대에 대두된 문제인 반면 냉담자는 61년도 교세통계표에 처음 등장한 60년대부터 시작된 문제이다.
61년도 교세통계표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냉담자수는 신자총수의 4%에 해당하는 1만9천9백 명으로서 그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다.
냉담자는 이후 계속해서 증가, 70년대 중반 13% 이상까지 육박했으나 88년 말에는 10.26%로서 비율면에서는 상당히 낮아져있다.
냉담자 증가요인은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간 급조된 신자들의 대거 탈락, 이동인구의 증가, 영세자에 대한 사전사후 교육부실, 관면혼인자의 급증, 그리고 교회제도상의 문제 등으로 지적할 수 있다.
교회당국은 70년대에 들어서 이 같은 문제점을 깊이 인식, 문제해결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전개해왔다. 교구 차원의 교육계획 수립, 본당별 피정을 통한 신자재교육 강화는 그대로 80년대로 이어지면서 구역반장교육, 각종 신심단체의 활성화 등으로 교재 빈곤, 지도자 부족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노력해왔다.
특히 레지오 마리애는 물론 70년대에 시작된 꾸르실료 운동, MBW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운동), 성령세미나 등 신심 운동의 활성화는 교세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거주불명자는 80년대중반 한때 감소의 가능성까지 보였으나 크게 개선의 기미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향자 사목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90년대에는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과제이다.
80년대 신자증가는 참으로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88년 말까지 9년 동안 매년 평균13만5천명 이상씩 늘어난 셈이다.
그러나 신자증가율면에서는 82년 이후 매년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88년말 신자 증가 수는 전년도에 비해 오히려 감소,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이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한계에 도달한 퇴조현상인지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앞으로 한두 해 정도 더 지켜봐야 하겠으나 이른바 「공안정국」의 여파로 인한 사제 파북 사건 등의 파장이 어떻게 미치느냐가 큰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여 진다.
신자증가율은 82년 이후 하강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복음화율은 매년 꾸준히 증가, 79년 3.29%에서 88년 5.76%까지 도달해 있다. 금년 말에는 6%선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80년대 9년 동안 공소 수는 1백87개소가 줄었으며 본당 수는 1백89개소가 증가, 32. 8%의 증가율을 나타냈다. 본당 신설은 같은 기간 동안 신자 증가 수 대비 33%에 불과, 본당의 대형화 추세가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울대교구의 경우는 같은 기간 동안 본당 신설에 비해 신자 증가율은 6.4배에 달해 본당대형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인 사제는 47.45%증가, 70년대 68%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으며 외국인사제의 감소로 인해 전체 사제 증가율은 34%선에 머물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소신학교 폐쇄, 대입고사제도 등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는 대구가톨릭대학(82년 개교), 수원가톨릭대학(84년)등 제3, 제4대신학교 개교에 이어 4개 대신학교의 입학정원이 증가하고 있으며, 부산ㆍ대전교구 신학교개교가 임박해 있다. 따라서 향후 사제성소 감소현상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90년대 사제증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낙관적이다. 이 같은 현상은 대신학생 수에서 명확히 나타나는데 88년 말 현재 대신학생 수는 79년에 비해 3.2배 늘어났다.
80년대 한국인 사제 수 증가는 본당 증가율(32.8%)은 앞섰으나 신자 증가율 (98%)에는 크게 미치지 못해 사제1인당 사목대상 신자수가 크게 늘어났다.
같은 기간 동안 한국인 수녀 수는 62%가 늘었으며 수사 수 역시 54.6%가 증가, 예상과는 달리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외국인 수사. 수녀는 약간씩 감소하고 있으며, 외국인 수사ㆍ수녀는 전체 이원가운데 각각 10%와 4%에 불과하다.
이밖에 80년대에는 70년대에 비해 병원, 양로원, 나환자 정착마을 등 기존시설은 크게 증가하지 못했으나 수용인원은 대폭 늘어나 질적으로 크게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70년대에 없던 결핵요양원 3개소, 부랑인 수용소시설6개소가 신설돼 사회복지사업이 다양하게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 반면 초ㆍ중ㆍ고 학교시설은 사회 현상에 따라 줄어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80년대 한국교회는 안정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가운데 조선 교구설정 1백50주년(81년),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 및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84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89년) 등 큰 행사를 치르면서 덩치 커진 자신의 모습에 상당한 자신감까지 겸비하게 되었다.
89년 한 해 동안 신자증가가 전년도 수준만 유지해준다 하더라도 89년 말 신자총수는 2백62만여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게 기준한 복음화율은 6%선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80년대는 70년대에 비해 교세 전반이 질적ㆍ양적 면에서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엄청난 외형적인 성장의 폭만큼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향후 90년대 한국교회는 희비가 교차되는 성장과 진통을 다함께 겪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도표1] 1980년대 연도별 교세 통계현황
[도표2] 교구별 복음화율 및 전출입자 현황(70년대와 80년대 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