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옥한 땅에서 싹 틔운 신앙, 한국교회 초석이 되다 증조부로부터 전해온 신앙 냉담해진 가족들을 떠나려는 아버지 최경환의 선택에 놀라 신앙 지키기 위해 고향 떠나 과거에는 형편이 부유했으나 그리스도 위해 궁핍 받아들인 가족의 회심이 큰 영향 끼쳐 삶으로 신앙 모범 보여준 부친 교리와 기도문 가르친 모친 부부의 종말론적 순교 영성은 최양업 신부 사명 완수의 힘
“부모가 착해야 효자 난다”는 말이 있다. 가문의 분위기나 집안 전체의 전통도 어린 자녀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누구보다도 부모의 존재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김대건, 최양업 모두 신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의 신앙을 토양 삼아 자신의 신앙을 싹틔울 수 있었다. 최양업의 탄생을 살피면 부모의 신앙이 얼마나 큰 모범이 되는지를 살필 수 있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두 번째로 최양업이 태어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 신앙에서 멀어진 집안, 신앙을 택한 아버지 최양업 집안 역시 김대건 집안처럼 대대로 신자 집안이었다. 최양업의 조카 최상종이 최양업 신부 생애를 기술한 「최 신부 이력서」에 따르면 최양업 가문의 신앙은 1787년 최양업 신부 증조부인 최한일이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최한일은 열심한 신자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그 아들 최인주의 셋째 아들이 최양업의 부친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이었다.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는 홀어머니와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선조 대대로 살아오던 한양을 떠났다. 정처 없이 길을 떠난 이들 모자는 충청도 홍주 누곡(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 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할 수 있었다. 박해로 살던 곳도, 재산도 버리고 떠난 그들이었지만, 신앙만큼은 놓치지 않았고, 최인주는 이존창 집안 딸과 혼인하며 자녀들에게도 신앙을 물려줬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신앙에서 멀어지고 만다. 성 현석문(가롤로)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기해일기」는 당시 최양업 집안이 신앙에서 멀어진 것에 대해 ‘최경환전’에서는 ‘가산의 부유함’을, ‘이성례전’에서는 ‘친척들의 번성’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모든 것을 잃고 떠나야 했던 기해박해 때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지만, 신유박해 후에는 오히려 편안한 환경이 신앙으로 가는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신앙을 선택함으로써 최양업 집안은 다시 신심 깊은 집안으로 변화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듣거나 읽기를 좋아하던 최경환은 가족이 신앙에 냉담해진 것에 회의를 느껴 왔다. 이에 여러 차례 모친과 형제들에게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좋은 곳으로 떠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최경환은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고 홀로 떠났는데, 이 일로 가족들은 크게 놀라 최경환을 데려와 함께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한양으로 떠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양에서도 박해자들의 표적이 되자 이 산골 저 산골을 떠돌며 가시덤불과 돌자갈밭을 개간해 연명하다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교우촌을 형성했다. 최경환의 신앙으로 온 가족이 회심하고 신앙에 의탁해 떠난 때는 최양업의 나이 12살 무렵이다. 이 사건은 최경환의 장자로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본 최양업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사제가 된 이후에도 이날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최양업은 1851년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최경환을 따라 가족이 회심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프란치스코(최경환)의 가족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 이런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다”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다”고 전했다. 충남대 국사학과 김수태(안드레아) 교수는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가문의 순교자 전기 중심으로」에서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다고 이해하면서, 그것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며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에 의하여 자기 가문의 천주교 신앙이 새롭게 변화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