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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2) 최양업 태어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1-19 수정일 2021-01-19 발행일 2021-01-24 제 322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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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땅에서 싹 틔운 신앙, 한국교회 초석이 되다
증조부로부터 전해온 신앙 냉담해진 가족들을 떠나려는 
아버지 최경환의 선택에 놀라 신앙 지키기 위해 고향 떠나
과거에는 형편이 부유했으나 그리스도 위해 궁핍 받아들인 가족의 회심이 큰 영향 끼쳐
삶으로 신앙 모범 보여준 부친 교리와 기도문 가르친 모친 
부부의 종말론적 순교 영성은 최양업 신부 사명 완수의 힘

수리산성지 성당에 걸려 있는 최경환 성인의 가족을 담은 그림.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부모가 착해야 효자 난다”는 말이 있다. 가문의 분위기나 집안 전체의 전통도 어린 자녀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누구보다도 부모의 존재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김대건, 최양업 모두 신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의 신앙을 토양 삼아 자신의 신앙을 싹틔울 수 있었다. 최양업의 탄생을 살피면 부모의 신앙이 얼마나 큰 모범이 되는지를 살필 수 있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두 번째로 최양업이 태어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 신앙에서 멀어진 집안, 신앙을 택한 아버지

최양업 집안 역시 김대건 집안처럼 대대로 신자 집안이었다. 최양업의 조카 최상종이 최양업 신부 생애를 기술한 「최 신부 이력서」에 따르면 최양업 가문의 신앙은 1787년 최양업 신부 증조부인 최한일이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최한일은 열심한 신자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그 아들 최인주의 셋째 아들이 최양업의 부친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이었다.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는 홀어머니와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선조 대대로 살아오던 한양을 떠났다. 정처 없이 길을 떠난 이들 모자는 충청도 홍주 누곡(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 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할 수 있었다. 박해로 살던 곳도, 재산도 버리고 떠난 그들이었지만, 신앙만큼은 놓치지 않았고, 최인주는 이존창 집안 딸과 혼인하며 자녀들에게도 신앙을 물려줬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신앙에서 멀어지고 만다.

성 현석문(가롤로)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기해일기」는 당시 최양업 집안이 신앙에서 멀어진 것에 대해 ‘최경환전’에서는 ‘가산의 부유함’을, ‘이성례전’에서는 ‘친척들의 번성’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모든 것을 잃고 떠나야 했던 기해박해 때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지만, 신유박해 후에는 오히려 편안한 환경이 신앙으로 가는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신앙을 선택함으로써 최양업 집안은 다시 신심 깊은 집안으로 변화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듣거나 읽기를 좋아하던 최경환은 가족이 신앙에 냉담해진 것에 회의를 느껴 왔다. 이에 여러 차례 모친과 형제들에게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좋은 곳으로 떠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최경환은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고 홀로 떠났는데, 이 일로 가족들은 크게 놀라 최경환을 데려와 함께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한양으로 떠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양에서도 박해자들의 표적이 되자 이 산골 저 산골을 떠돌며 가시덤불과 돌자갈밭을 개간해 연명하다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교우촌을 형성했다.

최경환의 신앙으로 온 가족이 회심하고 신앙에 의탁해 떠난 때는 최양업의 나이 12살 무렵이다. 이 사건은 최경환의 장자로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본 최양업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사제가 된 이후에도 이날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최양업은 1851년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최경환을 따라 가족이 회심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프란치스코(최경환)의 가족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 이런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다”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다”고 전했다.

충남대 국사학과 김수태(안드레아) 교수는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가문의 순교자 전기 중심으로」에서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다고 이해하면서, 그것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며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에 의하여 자기 가문의 천주교 신앙이 새롭게 변화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배티성지에 있는 최양업 신부 동상.

■ 신앙을 가르친 부모

최경환은 밭에서 일할 때나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나 항상 교리와 신앙에 대한 것만을 이야기하고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며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고, 모친을 섬기는 표양을 끊임없이 보였다. 최양업은 여덟 번째 편지를 통해 최경환에 대해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 가면서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돼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최경환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최양업에게 가르침이었다.

성 최경환이 삶 자체로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쳤다면, 최양업의 모친 복자 이성례(마리아)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최양업과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쳤다. 이성례는 충청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경기도로, 또 험한 산길을 방황하는 시간 속에서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먼 길을 걸으며 굶주리고 지쳐 칭얼거리면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가던 이야기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예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위한 인내심과 참을성을 가르쳤다. 최양업은 후에 자신의 모친이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고 회고한 바 있다.

차기진(루카) 소장(양업교회사연구소)은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에서 “최양업 신부의 신앙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먼저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를 들 수 있다”며 “이들의 일상생활과 육화론적 영성은 성장기의 최양업에게 많은 영향을 줘 신학생의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했으며, 그들의 종말론적인 순교영성은 최양업에게 고난을 극복하고 선교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이 됐다고 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김대건과 최양업의 탄생에서 볼 수 있는 신앙 전수 모습은 비단 김대건·최양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시대의 김대건·최양업의 탄생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모습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앙 전수 모습을 보면 김대건·최양업의 탄생에서 보여진 모습은 찾기 어려운 듯하다. 지난해 발표된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0~4세 신자의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2.7%(4만9949명)에 그쳤다. 모든 연령층 가운데서도 가장 적은 비율이다. 그만큼 자녀에게 유아세례를 통해 신앙을 전수하는 이가 적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탄생은 ‘신앙의 유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고, 그것은 좋은 신앙이 선대를 통해 되물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조 신부는 “김대건·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를 살피면 임자, 즉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강조하며 우리의 근원, 뿌리를 찾으려 했던 신앙이 드러난다”며 “집안과 부모를 통해 뿌리내린 신앙은 우리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청양다락골성지(생가터)

청양 다락골성지(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는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가 정착하면서 교우촌으로 변모한 마을이다. 다락골의 초입에 있는 ‘새터’는 최인주의 가족이 정착한 곳이자 최경환, 최양업 부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성지에는 최양업의 생가터와 ‘최양업 신부 기념관’ 등이 조성돼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