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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8) 김대건·최양업 순교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10-19 수정일 2021-10-19 발행일 2021-10-24 제 3266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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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의 두려움도 떨치고… 주님 향한 믿음 최후까지 지키다
형장에서도 당당했던 김대건 흔들림 없이 순교 의미 설파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인 최양업 목자 잃게 될 신자들을 걱정
매일 삶 속에서 주님 증거하고 순교를 통해 구원사업 완성

성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서울 새남터순교성지에 있는 기념성당.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우리는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을 순교라고 부른다. 교회는 “순교자는 자신과 사랑으로 결합된 그리스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며 “순교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와 그리스도교 교리의 진리를 증언한다”고 가르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473항) 우리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순교를, 또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땀의 순교’를 기리며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했음을 기억하고 현양하고 있다.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했던 두 신부의 모습을 돌아본다.

■ 두려움을 이긴 믿음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했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1846년 9월 16일 죽음을 앞둔 26살의 청년은 새남터 형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자신이 맞는 죽음의 의미, 바로 ‘순교’에 관한 가르침을 설파했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11월 3일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순교의 주인공, 바로 김대건의 마지막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죽음을 앞둔 김대건에게서는 일말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형집행 당시 김대건의 양 귀는 화살에 꿰뚫린 상태였고, 망나니들은 몽둥이를 들고 김대건의 주변을 맴돌며 김대건의 얼굴에 물과 회(灰)를 뿌렸다. 그리고 망나니들은 김대건의 머리채를 말뚝 대신 꽂아 놓은 창 자루에 매어놓고 반대쪽에서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했다. 보는 이들조차 공포를 느끼게 하는 이 상황 속에서 김대건은 냉정을 잃지 않고 망나니들에게 “이렇게 하면 제대로 됐소? 마음대로 칠 수가 있겠소?” 하고 물었다. 자세를 잡은 김대건은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됐소”라고 말하는 의연함까지 보였다.

죽음 앞에서도 침착한 모습은 최양업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최양업은 1860년 9월 3일 마지막으로 편지를 쓸 당시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다. 최양업을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이 더욱 옥죄어왔고 10년 이상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활동한 최양업에게조차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최양업은 오히려 이 편지가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하다”며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긴다”고 말했다. 최양업에게 염려는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목자를 잃은 양떼였다.

그러나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양업은 마지막 편지에서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며 “저희를 재난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김대건은 감옥에 갇혀 스승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께서 혹독한 모든 형벌을 끝까지 용감하게 이겨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대건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결박당한 저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굳게 믿고 있다”고 고백했다. 두 사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극도의 두려움을 이겨냈다.

■ 순교 영성을 살다

“오!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에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김대건은 1843년 요동에서 쓴 편지에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일을 두고 순교의 영광을 묘사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순교를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식은 단순히 그 죽음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의 신세는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최양업도 1844년 5월 19일 편지에서 순교자들의 업적을 칭송한다. 그리고 최양업은 신자들의 순교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사업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아직 그에 참여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순교(martyrium)는 본래 ‘증언’ 혹은 ‘증거’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가장 뛰어난 표현이 목숨을 바쳐 증거하는 일이기에 증거라는 말이 순교에 사용됐다. 김대건과 최양업이 죽음의 공포조차 이겨낸 믿음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늘 갈망했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늘 순교 영성을 살아가고 있었다.

삶 전체로 하느님을 증거하던 모습은 최양업의 선종에서도 찾을 수 있다. 페롱 신부는 1861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최양업은 길고 험한 공소 방문이 끝날 무렵 6월 15일에 사망했다”며 최양업의 마지막을 설명했다. 최양업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스도를 알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전국의 교우촌을 방문하다 결국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지고 만다.

최양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푸르티에 신부가 찾아왔을 때는 이미 최양업의 의식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최양업은 “예수 마리아”를 중얼거리다 선종했다. 무의식 속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죽음에 이른 것이다.

조규식 신부는 「성 김대건 신부의 영성」에서 “김 신부는 사목 활동에 임하면서 자신이 특히 성직자로서 언제 체포될 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면서 “그는 매일의 삶을 순교로써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안동교구 진안리성지.

■ 김대건·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있는 곳 – 서울 새남터순교성지, 안동교구 진안리성지

서울 새남터순교성지는 김대건이 순교한 곳이다. 또한 교회를 이끈 지도자들이 많이 순교한 자리로, 11명의 사제가 이곳에서 순교했다.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여러 평신도들이 순교한 자리이기도 하다.

안동교구 진안리성지는 최양업이 선종한 장소다. 충북과 영남의 관문에 자리한 이곳은 최양업은 물론 강 칼레 신부 등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선교와 피난을 위해 오간 길목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