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교회의 상황 베롤 주교에게 전하다
소리웃은 전라도 교우촌, 용인 손골, 불무골이나 오두재 인근 교우촌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최양업 신부의 1857~1858년 사목 경로 중 일부 지역으로 판단할 수 있다. 1857년 10월 20일 소리웃에서 쓴 서한에는 1856년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입국한 사실, 1857년 다블뤼 신부의 주교 서품식, 그리고 성무를 집행할 때 외교인들과 충돌한 사건 등이 담겨 있다. 이듬해 10월 3일, 오두재에 쓴 편지에서 흉년과 가난으로 민심이 흉흉하다고 밝혔던 최양업은 소리웃에서의 편지에서도 “외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조선인은 프랑스 배가 와서 조선 사회를 변화시켜 줄 것을 바라고 있다”고 말하며 조정을 불신하는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최양업은 1859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세 통의 서한을 쓴다. 10월 11일에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2일에는 리브와 신부에게, 13일에는 베롤 주교에게 각각 서한을 보낸다. 앞선 두 통의 서한이 교우촌과 신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조선 조정의 상황, 박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도움을 적고 있다.
최양업은 조선에서 외적인 박해가 중단된 이유를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영향으로 분석함으로써 조선이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