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복음화를 위한 간절함, 베롤 주교에게 전하다
최양업은 베롤 주교에게 1857년과 1859년 두 차례에 걸쳐 서한을 보낸다. 스승 신부들에게 부친 편지에서는 조선 신자들의 가련한 처지와 순교자들의 행적이 주를 이뤘다면, 최양업은 베롤 주교에게 조선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전한다.
“날로 조선 전체에, 심지어 외교인들까지도 거의 모두가 프랑스 배들이 왔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는데, 프랑스를 통해 조선이 보다 개선되리라는 이런 속된 전반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연유하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지배계층의 수탈과 흉년이 이어진 가운데 민심이 흉흉했던 1850년대, 조선에서는 “차라리 서양 함선들이 빨리 와 더 좋은 상태로 철저하게 개혁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최양업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들어온다면 조선교회의 상황도 나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조선에서 사목한 지 7년을 넘어선 최양업은 선교사의 힘만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알았고,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외부세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따라서 최양업은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외적 박해가 중단된 이유를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영향으로 분석, 조선이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다.
“북경과의 연락을 통해 중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준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저들(프랑스 군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조선 조정은 공적으로 대놓고 우리 신자들을 박해하거나 적어도 대략은 행방을 알고 있을 우리 선교 신부님들을 체포하지 않는 듯합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프랑스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한 최양업의 행적에 대해 “그가 무력에 의해 상업적 이득을 취하려는 제국주의 내지는 식민주의를 용인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며 “그는 우호조약을 통한 종교보호 정책 내지는 신앙의 자유를 희망하고 있었으며 그 배경에는 조국의 복음화를 간절하게 원했던 선교 우선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전했다.
■ 조선 신자들의 가련한 상황, 편지에 담다
조선 신자들의 가련한 상황들도 최양업은 잊지 않고 베롤 주교에게 전하고 있다. “두려움을 모르는 적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서 자기의 재산을 던져버리고 온갖 곤궁과 치욕을(감수하면서까지) 신적 소명을 따릅니다. 그들은 충실하게 복음의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올해 저희 관할구역만 하더라도 500명의 예비신자들이 있고 그중에서 2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성무를 집전하면서 외교인들과 충돌한 사건도 전하며 베롤 주교에게 복된 그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다.
“성무를 집전하고 있던 마을에 저를 잡으려고 무장을 하고 침입했던 난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의 난동을 통해서 몇몇 거짓 신자들은 이탈자들이 되었지만 반면에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로 같은 기간 중 어떤 마을 전체가 온전히 회두해 전부 신자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