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 (22)원주교구 배론성지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입력일 2022-11-15 수정일 2022-11-18 발행일 2022-11-20 제 331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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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선조 숨결 품은 주님의 정원… 순교 정신 드높인 신앙인의 고향
1800년대 박해로 인해 형성된 교우촌
배 모양의 최양업 기념 성당과 소성당
황사영 백서 토굴·성 요셉 신학당 보존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 성지 곳곳에

배론성지에 있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성당 전경. 성모상 주변에는 로사리오길이 잘 조성돼 있어 신앙인들이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성당 내부 전경.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정원으로 불리는 곳, 배론성지(舟論聖地)는 충북 제천의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다. 배론은 180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교우들이 모여 형성한 오래된 교우촌이다. 교우들은 화전과 옹기를 구워 팔며 궁핍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살았다. 배론성지는 신앙인의 고향처럼 모든 사람을 반기면서 따뜻이 품어준다.

배론은 충북 제천시에 있는 지명인데 배의 밑창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론성지 양쪽에는 낮은 산이 있고 작은 개울이 흘러서 정겨운 느낌을 준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여러 상징 가운데서 배는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알려주기 때문에 배론이 교우들에게 더욱 특별히 다가온다.

11월 초순쯤, 배론성지를 순례했을 때 단풍은 절정기를 지났지만 화창한 날씨에 많은 사람이 방문하였다. 특히 가족 단위의 방문객과 젊은이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단풍처럼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는 순례자들도 있었고 성지의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기다랗게 형성된 성지 초입에는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가 있다. 2020년 축복식을 한 기도학교는 배론성지에서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 단순한 형태의 건물은 이곳 성지가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장소라는 것을 말한다.

기도학교를 지나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면, 바닥에 인생 미로를 새긴 커다란 작품이 있고, 건너편에는 1998년에 건립된 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당은 노아의 방주처럼 배의 형상으로 언덕에 있으며 주변의 성모 동산에는 성모자상(최봉자 수녀 작)이 있다. 성모상 주변에는 로사리오(장미정원을 뜻하는 라틴어 로사리움에서 유래) 길이 잘 조성되어 묵주기도를 바치며 신앙을 키울 수 있다.

큰 배 모양의 성당은 우리나라 출신의 두 번째 사제인 가경자 최양업 신부(토마스, 1821~1861) 기념 성당이고, 그 옆에 작은 배 모양의 성당은 소성당이다. 기념 성당 출입문 앞에는 손에 묵주와 지팡이를 짚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최양업 신부 상이 있다.

대성당과 소성당 내부도 외양과 마찬가지로 배 모양이다. 성당에는 우리나라 가톨릭 미술가 회원들이 만든 성화와 성상이 자리 잡아 경건한 분위기를 더해 준다. 권녕숙, 김겸순 수녀, 김일영, 김형주, 나희균, 마르크 수사, 변진의, 임송자, 장동호, 조영동 작가(가나다순) 등이 성미술 제작에 참여하였다. 또한 최양업 기념 성당에는 성 김대건 신부(안드레아, 1821~1846)와 성 남종삼 순교자(요한, 1817~1866) 유해를 모셔 내부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준다. 기념성당 뒤에는 최양업 신부 조각 공원이 있는데 부조 작품을 통하여 최 신부의 삶과 신앙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성지의 다리를 건너면 한옥 순교자들의 집, 한옥 누각 성 요셉 성당, 무명 순교자의 묘, 마음을 비우는 연못이 있다. 이곳의 아름다운 하천과 산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성찰한 후 또 다른 곳으로 순례를 계속한다.

순교자 황사영 현양탑.

배론성지의 특별한 구역으로 들어가는 진복문(眞福門)의 양쪽 기둥에는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란 글이 적혀 있다. 진복문으로 들어가면 우리 신앙 선조들이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에는 배론성지의 세 가지 보물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사영 백서(帛書) 토굴(1801.2~9월), 성 요셉 신학당(1855~1866), 최양업 신부의 묘(1861.11-현재)가 있다.

백서 토굴은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 현양탑 옆에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8개월 동안 옹기굴을 가장한 이곳 토굴 속에 머물며 중국 베이징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의 소재는 명주천이고, 가로 62cm, 세로 40cm이며, 122행 1만3384자이다. 이 백서는 인사말, 신유박해 상황, 순교자 열전,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으려는 방안, 관면 요청과 맺음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백서가 중국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황사영은 1801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고 가족도 귀양을 갔다. 현재 백서 원본은 바티칸 민속박물관(Misionero Ethnological Museum)에 보관 중이다.

성 요셉 신학당은 1855년 매스트르 신부(Maistre, 1808-1857, 파리 외방 전교회)가 설립하였다. 이때 교우촌의 회장 장주기 성인(요셉, 1803~1866)은 자기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하였다.

1856년부터 푸르티에 신부(Pourthié, 1830-1866)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Petitnicolas, 1828-1866)가 교수로 재직했다. 이 신학당은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격식을 갖추어 설립된 신학교였다. 그러나 두 신부는 신학당에서 체포되어 1866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함으로써 문을 닫았다. 초가집인 신학당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88년에 황사영 백서 토굴과 함께 복원하였다.

배론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는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다. 그는 아버지 최경환 성인(프란치스코, 1805~1839)과 어머니 이성례 복자(마리아, 1801~1840) 사이에서 태어났다. 1836년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가서 신학 교육을 받고, 184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11년 반 동안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교우들을 방문하며 모든 힘을 다해 사목하였다. 그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에 있는 6000여 명의 신자들과 127개의 공소를 돌보았다. 최 신부는 사목 방문 도중에 가끔 배론 신학당에 들러 휴식을 취하였다. 하지만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문경의 한 교우촌에서 질병과 과로로 안타깝게 선종하였다. 그해 11월경 교구장 베르뇌 주교(Berneax, 1814~1866, 파리 외방 전교회)가 최양업 신부 묘를 현재의 배론성지 뒷산 자리로 이장하였다.

최양업 신부 묘지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조금 내려가면 원주교구 성직자 묘역이 있다. 이곳에는 한평생 자신을 봉헌하며 헌신적으로 사목하다 하느님 품에 안긴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다니엘, 1921~1993)와 성직자들이 안식을 누리고 있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배론성지를 순례하면서 지금 우리가 간직한 믿음이 신앙 선조들과 많은 순교자, 선교사들과 앞서 살았던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의 고귀한 희생을 통해 주어졌음을 다시 깨닫는다.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