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같은 고문과 공포조차도… 주님 향한 믿음 빼앗지 못했네 끓는 물 끼얹는 혹독한 형벌 정권의 불의와 탄압 속에서도 믿음 지켜낸 일본교회 신자들 찬란한 신앙 역사 영원히 남아
일본 초기교회 역사는 앞을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길고 거대한 터널과도 같았다. 상상조차 힘든 무자비한 탄압과 비극으로 점철된 박해의 역사. 과연 이 땅에 복음이 조금이라도 자리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직접 둘러본 나가사키 세계유산 순례의 길에는 모진 박해에도 십자가를 당당하게 내걸었던 일본 초기교회 신자들의 숨결이 묻어 있었다.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 불의를 행한 정권 앞에서도, 배교를 강요하며 지옥과도 같은 형벌로 탄압했던 금교 정책 앞에서도, 신자들은 의연히 고난을 감내했고 오직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며 후손에 신앙을 전수해나갔다. 결국 주님의 뜻은 이루어졌다.■ 주님 위해 생명 바친 신자들, 간절했던 신앙 영원히
시마바라 반도 최남단에 있는 나가사키현 미나미시마바라(南島原)시에는 일본 최초의 소신학교이자 종합교육기관이었던 ‘아리마 세미나리요’(有馬のセミナリヨ) 옛터가 있다. 이 지역 영주였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위해 세례를 받으면서 천주교 선교가 가능해졌고, 예수회가 1580년 ‘아리마 세미나리요’를 설립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의 학생은 총 22명이었으며 라틴어와 포르투갈어, 미술과 음악은 물론 화약술을 배우기도 했다. 특히 이토 만쇼(伊東マンショ), 치지와 미구엘(千々石ミゲル), 나카우라 줄리안(中浦ジュリアン), 하라 마르티노(原マルチノ) 등 10대 학생 4명은 ‘덴쇼(당시 일본의 연호) 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이라는 이름으로 1582~1590년 일본 최초로 유럽에 파견됐다. 예수회 선교사 발리냐노(Valignano) 신부가 일본 조정을 대신해 학생들이 교황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소년사절단은 스페인 국왕과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을 알현하고 환대를 받았으며 로마 시민권을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각국을 차례로 방문하고 문화를 배웠으며, 교황으로부터 일본 영주에게 전해줄 선물을 받고 귀국했다. 이들의 업적은 서양 세계에 일본교회를 널리 알리는 한편 동아시아 최초로 유럽에서 활판인쇄기를 들고 와 일본에서 교리서를 인쇄함으로써 선교 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소년사절단 중 배교한 치지와 미구엘을 제외한 3명은 사제가 됐다. 특히 나카우라 줄리안은 1633년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으며 2008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됐다. 이처럼 아리마 세미나리요 옛터 인근 지역은 활발한 선교활동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금교 정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희생됐다. 인근 강변에 있는 ‘아리마가와 순교지’(有馬川殉敎地)에서는 1613년 당시 영주였던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가 배교를 거부하는 자신의 신하 3명과 가족 5명을 각각 8개의 십자가에 매달아 주민 2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시켰다. 이후에도 배교를 거부한 신자 17명이 참수되는 등 이 지역에서의 순교는 계속됐다.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有馬キリシタン遺産記念館)에서는 나가사키의 천주교 전래와 번영, 가혹한 탄압, 신자 잠복부터 부활까지 자세한 자료를 통해 일련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1550년 예수회 선교사 하비에르(Francis Xavier)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한 이래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일본 초기교회 신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신앙의 발자취는 아직도 일본 땅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리고 신자들의 가슴 속에도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일본 나가사키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