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8월 14일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벗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랑의 순교자
유다인 도왔다는 이유로 끌려와
고해성사·면담으로 수감자들 위로
다른 이 대신 죽겠다고 자원해
2주 후 나치의 독극물 주사로 최후
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신부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자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동료를 대신해 죽은 ‘사랑의 순교자’다. 콜베 신부는 성모 신심을 전파하는 데 전념했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2년 콜베 신부를 시성하며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친 모든 순교자의 모범인 그리스도와 닮았다”고 칭송했다. 아마추어 무전사, 양심수, 수감인, 가정, 언론인의 수호자인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삶을 알아본다.
성모 신심 깊은 수도자
콜베 신부는 1894년 1월 8일 당시 러시아제국령이었던 폴란드의 주둔스카볼라에서 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라이문트였다. 아버지 율리우스 콜베는 독일계 폴란드인이었고 어머니 마리아는 폴란드인이었다. 콜베 신부는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부모의 신앙 교육 덕분에 강한 성모 신심을 갖고 성장했다.
12살이던 1906년, 콜베 신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성모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콜베 신부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밤 성모님께 내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를 물었다. 성모님께서 흰색과 빨강색 두 개의 왕관을 가져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물었는데, 흰 왕관은 내가 동정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빨간 왕관은 내가 순교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두 개 다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1907년 콜베 신부는 형 프란치스코와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던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수도회에 입회해 막시밀리안이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1911년 첫 서원을 했고 1914년 종신서원을 하면서 마리아를 수도명에 추가했다. 성모님에 대한 자신의 신심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1912년 콜베 신부는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입학했고, 1915년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콜베 신부는 교황청립 성 보나벤투라 신학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이 무렵 프리메이슨에서 반교황 캠페인을 벌이자 이에 대항하여 6명의 동료 수사들과 1917년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소책자와 월간지를 출판해 그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콜베 신부는 1918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폴란드로 돌아왔다.
귀국한 후 콜베 신부는 원죄 없으신 성모 신심 전파에 힘썼다. 또한 좌익, 특히 공산당 운동에 반대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콜베 신부는 크라쿠프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다. 또 라디오 방송국과 출판 사업에도 참여했다. 1922년 잡지 ‘성모의 기사’를 창간했고, 1927년에는 바르바샤 인근에 니에포카라노프 수도원(원죄 없으신 성모 마을)을 설립했다.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콜베 신부는 동아시아 선교에 집중했다. 일본 나가사키 외곽에 수도원을 세우고 일본어판 ‘성모의 기사’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일본어판 ‘성모의 기사’는 1933년 월간 5만 부의 발행부수에 이르는 잡지가 됐다. 1932년 인도 말라바르에 수도원을 세웠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1933년 잠시 폴란드에 들렀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때 콜베 신부는 잠시 한국에서 머물기도 했다.
벗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
1936년 니에포카라노프 수도원 원장에 선출돼 폴란드로 돌아왔다. 당시 유럽은 나치의 위협 속에 있었고 폴란드 역시 1939년 9월 나치의 침입을 받았다. 나치의 침공 직후 잠시 구금되기도 했던 콜베 신부는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왔고, 이후 가난한 이들과 박해받는 유다인들이 수도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1941년 그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유다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 17일 4명의 수도자와 함께 그를 체포해 바르샤바의 파비악 형무소에 감금했다. 이후 5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로 이송했다. 여기서 그의 수감번호는 16670이었다.
수용소에서 콜베 신부는 유명한 사제였기에 더 혹독한 강제노동과 고문, 매질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콜베 신부는 힘든 상황에서도 오히려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다.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설교와 면담으로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는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10명을 처형했다. 나치는 10명을 지목해 지하벙커에 가두고 굶겨 죽였다. 수감자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비인간적인 형벌이었다. 지목된 10명의 처형 대상자 중에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콜베 신부는 대신 죽겠다고 자원했다. 나치는 그의 자원을 허락했고 콜베 신부는 다른 9명과 함께 지하벙커에 갇혔다.
하지만 지하벙커에 감금된 이들은 저주하거나 울부짖지 않고 오히려 묵주기도를 드리고 성모 찬가를 노래했다. 한 증인에 따르면 콜베 신부는 지하벙커에서 수감자들과 함께 기도했으며, 가운데 앉아 수감자들의 상태를 지켜보고 위로했다. 이렇게 2주일이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막시밀리안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나치는 콜베 신부를 비롯해 살아있던 이들에게 독극물을 주입해 죽였다. 1941년 8월 14일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이튿날 불태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가조브니체크는 열정적으로 콜베 신부의 영웅담을 세상을 알렸다. 그는 1955년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됐고, 1971년 10월 17일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에서는 처음이었다. 이어 1982년 10월 10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콜베 신부를 순교자로 시성하면서 ‘고난으로 가득 찬 우리 세기의 수호자’로 선포했다. 가조브니체크는 콜베 신부의 시복식과 시성식에도 참석했고, 1995년 죽은 뒤에는 콜베 신부가 세운 니에포카라노프 수도원에 묻혔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시성식 미사 강론에서 “콜베 신부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놓았다”면서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죽음에 직면했고 이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뤄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