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8월 21일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배움 기회 주고자
본당에 학교 세워 밤낮으로 교육
전례 개혁·교회법 편찬 착수 등
현대교회 쇄신 위한 초석 다져
영성체 중요성 강조한 ‘성체의 교황’
성 비오 10세 교황은 스스로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랑했다. 단순하고 한결같이 선한 마음과 가난의 정신을 소유한 인물로, 생전에도 신자들에게 성인으로서 존경받았다. 특히 매일 영성체를 할 것을 강조했고, 첫영성체 나이를 7세로 앞당기는 등 ‘성체의 교황’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교황청 구조를 개편하고, 전례를 개혁하며 교회법 편찬을 시작하는 등 현대교회의 초석을 쌓은 성 비오 10세 교황의 삶을 알아본다.
가난한 이웃, 젊은이를 사랑한 사목자
성 비오 10세 교황의 세속명은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Giuseppe Melchiorre Sarto)로 1835년 6월 2일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 인근 리에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사르토와 어머니 마르가리타의 10남매 중 둘째였다. 아버지 조반니는 우체부였고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재봉사였다. 가난했지만 사르토 부부는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키우려고 노력했고, 주세페는 말과 행동으로 신앙의 모범을 보인 부모 아래에서 성장했다.
부모는 가난했지만 자녀들의 교육을 최우선으로 두었고, 주세페는 집에서 본당 신부의 지도로 라틴어 등을 공부했다. 주세페는 11살 때 아버지에게 사제가 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아버지는 본당 신부의 도움으로 그를 집에서 약 10㎞ 떨어진 학교에 보냈다. 15세에 이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주세페는 파도바교구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 시절 주세페는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열심히 기도하고 상냥하며 겸손한 학생으로 기억된다. 1858년 23세가 된 주세페는 신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톰볼로본당 보좌로 사목생활을 시작한 주세페는 고령의 주임 신부를 도와 8년 동안 거의 주임 신부의 역할을 했다. 열정적으로 강론을 했으며 특히 젊은이들을 사랑했다. 가난한 청년들의 교육을 위해 본당에 학교를 세워 읽고 쓰기를 가르쳤고, 밤에는 어른들이 이 학교를 가득 채웠다. 성가대에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게 했다. 사목생활 중에 여유가 생기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했다.
1876년 그는 32세의 나이에 살차노본당 수석사제로 임명됐다. 주세페는 9년 동안 이 본당에서 사목하며 가난한 농부들과 목동들을 위해 힘썼다. 이곳에서도 역시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운영했으며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는 지역 병원들을 지원했다. 주세페 신부의 재능과 열정을 눈여겨본 트레비소교구장 페데리코 마리아 치넬리 주교는 그를 몬시뇰에 임명하고 교구 사무처장과 신학교 학장 및 영성 담당의 일을 맡겼다. 교구 사무처장으로 주세페는 가톨릭계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공립학교 학생들에게도 종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신학교에서는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주세페는 1884년 당시 쇠락해가던 만토바교구장에 임명됐다. 당시 신학교에 남아 계속 학생들을 지도하길 원했던 주세페는 레오 13세 교황에게 자신의 주교 임명을 재고해 달라고 청했지만, 레오 13세 교황은 “순명하라”는 한 마디 말로 그의 주교 임명을 밀어붙였다. 만투아교구 교구장으로 주세페는 사제들을 독려해 미사에 그레고리오 성가를 도입하도록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육 방법론을 도입했다. 동시에 여러 계층의 신자들을 직접 만나며 교구를 활성화시켰다.
1893년 6월 레오 13세 교황은 주세페를 추기경에 서임하고 베네치아총대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주세페는 자신의 추기경 서임 소식에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걱정스럽고, 두려우며, 무안하다”고 밝혔다. 그의 베네치아총대교구장 소임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총대교구장 임명권을 갖고 있었던 베네치아 정부와 마찰을 빚어 부임이 18개월이나 늦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주세페는 10년 동안 지혜롭게 정부와 협력하며 사회주의에 대항하고 신자들에게 헌신했다.
베네치아총대교구장으로 주세페는 그동안 하던대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또 기회가 될 때마다 가난한 이들을 만나며 이들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근대주의에 대항해 교회를 지킨 수호자
1903년 7월 20일 레오 13세 교황이 선종한 뒤 콘클라베가 열렸다. 주세페는 콘클라베에 들어가기 전 “교황이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콘클라베 시작 전 한 프랑스의 추기경이 그에게 프랑스어로 말을 붙이자 그는 라틴어로 프랑스어를 모른다고 답했는데, 그 추기경은 “프랑스어를 모르면 교황이 되긴 어렵겠다”고 말했다. 이에 주세페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교황이 될 욕심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콘클라베에서 유력한 후보는 국무원 총리였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콘클라베에 외세의 개입이 가능했다. 오스트리아제국 황제는 람폴라 추기경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고, 콘클라베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람폴라 추기경에게 향했던 표들이 주세페에게 던져졌고, 주세페는 그해 8월 4일 교황으로 선출됐다. 주세페는 자유주의적 신학 해석에 대항하고 교황의 수위권을 위해 싸웠던 비오 9세 교황(재위 1846~1878)을 따라 교황명을 비오로 정했다. 비오 10세 교황이 된 주세페는 훗날 콘클라베에서 외세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교황 선출 규칙을 수정했다.
비오 10세 교황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에페 1,10)를 사목 표어로 정하고 정치적인 교황보다 종교적인 교황이 되겠다는 사목 지침을 명확히 했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자유로운 신학 해석을 막고 전례와 교회법 개혁에 힘썼다. 그는 1908년 교황청을 11개의 성과 3개의 법원, 5개의 사무처로 개편했다. 교회법 편찬을 시작했으며, 후임인 베네딕토 15세 교황이 1916년 현대적인 교회법을 반포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불가타 성서 개역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일도 개정을 명령했다.
특히 비오 10세 교황은 성체를 자주 영하도록 권장했다. 아울러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교리 교육을 하는 것을 즐겼던 비오 10세 교황은 첫영성체 나이를 12세에서 7세로 낮췄다. 어린이를 포함해 모든 신자들이 더 자주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비오 10세 교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22일 만인 1914년 8월 20일 선종했다. 그는 평화의 회복을 위해 전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말년에도 특별히 가난하고 아픈 이들과 자주 만났고, 교황을 만난 이들 사이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가 선종하자 이탈리아 언론은 “성인이 선종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비오 10세 교황은 1951년 6월 3일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고, 1954년 5월 29일 시성됐다. 교황으로서는 1712년 성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242년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