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월이 되기 전에 ‘본당에서 순교자 성월을 신자들과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내면 좋을까?’ 하며 궁리하게 된다. 한국 천주교회는 거의 100년간의 박해로 103위 성인, 124위 복자, 그밖에 수많은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다. 우리 신자들의 엄청난 노력과 기도에 힘입어 시성·시복된 분들이 총 227위나 되니 참으로 감격스러울 뿐이다. 그분들이 성인·복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던가? 그런데 문제는 시성·시복된 성인·복자들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이다. 단지 몇 분의 순교자들만 기억에 남을 뿐, 나머지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예전에도 지적된 바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순교자들조차 그분들의 순교 상황에 대한 짧은 지식과 정보만 있을 뿐이지 그분들이 삶 안에서 어떻게 신앙을 실천해왔는지, 어떻게 이웃사랑을 실천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잘 알려진 몇 분의 순교자에 대해서는 책과 연극, 오페라나 뮤지컬, 영화 등의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분들의 신앙과 삶이 재현되면서 그분들을 아는 기회가 가끔씩 있어왔다. 성 김대건 신부에 대한 창작 뮤지컬과 영화 ‘탄생’, ‘순교복자 유항검의 딸 유섬이’ 뮤지컬, ‘서울할망 정난주’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다루기도 했다. 순교자들에 관한 책도 상당히 많이 발행되었다. 소설로는 「차쿠의 아침 마지막 이야기」, 「누이여 천국에서 만나자」, 「흑산」, 「파격」, 「두물머리 사람들」 등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저술들이 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왔지만 아직도 소수의 생산자와 소수의 소비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걷기문화의 일상화로 국내 성지순례가 호응을 얻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특히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은퇴 후 개인, 부부, 혹은 단체별로 성지순례가 각광을 받고 있다. 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위원회’에서는 전국 성지순례 책자를 활용하여 완주한 사람에게 담당 주교의 축복장을 수여하고 있어 분위기를 띄우는데 더욱 일조하고 있다. 본인은 이미 10년 전에 사목하던 본당에서 성지순례팀을 구성하여 많은 신자들이 성지순례를 하도록 한 바 있다. 옛날에 비하면 성지순례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직도 아쉬운 점이 있다. 순례자들이 성지에 도착하면 으레 잘 조성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을 따라 기도를 바친다. 그러고는 성지 미사를 봉헌하고 그 후에 식사를 하고나서 잠시 산보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전부다. 분명히 성지를 다녀오기는 했는데, 어느 순교자의 성지인지, 그 순교자의 삶과 죽음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저 경치 좋은 곳에서 기도와 산보를 잘 할 수 있도록 조성된 성지의 이미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몇 군데 성지를 제외하고는 그 성지를 설명해주는 팸플릿이나 영상물 등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자면, 성지의 하드웨어는 잘 꾸며져 있는데 소프트웨어라는 콘텐츠가 별로 없어 아쉽다.
여러 본당에서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통해 의미 있게 보내려는 시도를 한다. 예를 들어 본당 신자들 20여 명이 한 팀이 되어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의 순교를 다룬 연극을 연습하고 주일미사 강론 중에 공연을 한다면, 눈앞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고문 현장과 피를 흘리며 순교하는 장면을 바라본 신자들은 눈시울이 붉어질 것이다. 말씀으로도 순교에 대한 강론을 할 수 있지만 연극으로 간접적 체험을 하는 신자들에게 순교정신이 더욱 크게 새겨질 것이다. 또한 ‘9월愛 동행’ 행사에 참여해서 서울 안에 있는 순교성지, 교회사적지, 순례 등 총 24곳을 순례하는 프로그램에 본당 신자들이 단체로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번 9월에는 오래 기억에 남는 순교자 성월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