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를 위한 죽음 앞에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을 알리다
김대건 신부 체포로 재시작된 박해
선교사 살해 관련 항의 표명 위해
프랑스 함대 조선땅에 나타나자
천주교 신자 모두 역적으로 몰려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
시신도 감시했던 박해자들 눈 피해
밤에 산길로 이동해 미리내에 안장
경기도 안성 시궁산과 쌍령산 사이에 패인 골짜기. 신자들이 개천을 따라 숨어살며 밝힌 호롱불빛이 마치 은하수 같다 해서 ‘미리내’라고 불리는 곳. 바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묻힌 성지다. 김대건 성인이 순교한 병오박해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
성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은이공소에서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서해로 향했다. 바닷길을 통한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성 김대건 신부는 마포에서 배를 타고 연평도, 순위도를 거쳐 백령도에 다다랐다.
한강에서부터 그려온 연안의 지도를 회오리바람 때문에 잃어버리는 소소한 사건은 있었지만, 순조롭게 조사가 이뤄졌다. 성 김대건 신부는 중국 어선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3~5월 이곳에 모였다가 돌아간다는 것을 파악해 선교사 입국에 이용하고자 했다. 성 김대건 신부는 중국 배와 접촉해 중국 곳곳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지도를 보냈다.
문제는 귀환하던 중 생겼다. 순위도 등산진을 관할하던 수군들이 성 김대건 신부의 배를 징발하려 하면서 시비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 시비에서 성 김대건 신부를 수상하게 여긴 관헌들이 6월 5일 그를 체포했다. 그리고 성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영으로 압송돼 심문을 받았다. 그의 소지품에 천주교서적, 성화가 그려진 비단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헌들은 처음에 ‘천주교를 믿는 중국인이 국경을 넘어와 체포됐다’고 오해했다. 성 김대건 신부를 체포할 당시 그의 물건에 중국 물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문초를 통해 성 김대건 신부가 용인 태생이며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조선 정부는 크게 술렁였다. 조정은 중신 회의를 열고 논의할 정도로 그의 체포를 크게 받아들였다. 대신들 중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외국어 능력과 박학한 지식에 감탄하면서 성 김대건 신부를 회유해 포섭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성 김대건 신부는 대신들의 요청에 따라 영국의 세계지도를 번역해주고, 지리개설서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회유와 혹독한 고문 중에도 성 김대건 신부는 ‘하느님을 위해서 죽겠다’면서 교회와 신자들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병오박해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였지만,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다시 박해가 시작됐다. 바로 1846년 병오박해였다.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붙잡힌 일꾼 등 비신자들은 박해가 시작되자 그와 관련된 신자들의 정보를 진술했다. 조정은 이 신자들을 잡기 위해 서울을 비롯해 경기도 이천·양지·은이와 충청도,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포졸들을 보냈다.
그래서 회장으로 활동하던 성 남경문(베드로)과 성 한이형(라우렌시오)이 붙잡혔다. 성 현석문(가롤로)은 박해 소식에 서울 석정동에 있던 성 김대건 신부의 거처를 관리하던 성 우술임(수산나), 성 김임이(데레사), 성 이(아가타), 성 정철염(가타리나) 등을 피신시켰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발각됐고, 자신 역시도 잡혔다. 그리고 성 김대건 신부에게 배를 빌려준 죄로 붙잡힌 성 임치백(요셉)은 옥중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박해가 이뤄지던 중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의 세실 함장이 군함 3척을 끌고 충청도의 외연도에 나타나 기해박해 당시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살해된 것에 항의하는 서한을 전하고 떠났던 것이다. 여러 대신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프랑스 군함을 불러들인 것이라며 성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성 김대건 신부를 효수경중하도록 했다. 효수경중이란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사람들이 경계하도록 하는 일이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를 앞두고 처형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고 망나니에게 목이 잘려 순교했다. 이어 19일 현석문이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20일 병오박해로 붙잡힌 사람들도 순교했다. 이렇게 병오박해가 마무리됐다. 교회는 병오박해로 순교한 9명을 성인으로 현양하고 있다.
사형집행 이후 죄수는 사흘이 지난 후 연고자가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지만, 조정은 성 김대건 신부를 참수된 자리, 바로 새남터 모래밭에 파묻고 군졸이 지키고 있도록 했다. 미리내 교우촌의 이민식(빈첸시오)을 비롯한 여러 신자들은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다 10월 26일 그의 시신을 빼냈다. 이민식은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밤에 험한 산길로 이동해 10월 30일 미리내에 성 김대건 신부를 안장했다.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성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이후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신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며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직을 몇 년 동안만 더 했더라면 지극히 유능한 신부가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