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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현행 『새공과』는 반드시 『옛공과』로 돌아가야 한다

朱在用 神父
입력일 2021-07-02 수정일 2023-10-13 발행일 1960-05-29 제 231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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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중요한 것 몇가지를 논한다

(5)

이상 12건 등만 보더라도 대조표 중 “망친 것”에 실린 약2백여가지가 일일히 문제거리임을 넉넉히 알 것이므로 이제는 더욱 중요한 것 몇가지를 말하겠다.

⑬ 85면=옛공과의 “진짓 사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를 새공과에는 “짐짓 사람을 위하여”라고 그야말로 짐짓 망쳐놓았다. 여기 한번만 그리 했다면 혹 인쇄 오식으로 볼 수 도 있겠는데 적어도 6차나 (옛공과에 정작 “짐짓”은 꼭 한번뿐(94면)으로서 이것은 제외하고도 6차) “진짓”이 나오는대로 모조리 “짐짓”으로 고친 것을 보면 ”진직”과 “짐짓”을 전연 분간 못하였음이 확연하다. “짐짓”은 일부러 고의(故意)의 뜻이요” ”진짓”은 진시(眞是) 진개(眞個) 곧 진실로, 정작 참으로외 뜻이다. 그러고 보니 “진짓”을 “짐짓”으로 고치는 것은 짐짓(일부러) 범하는 교리위반이다. <도마스>의 성체 찬양가에 “더 짐짓 이 형상 안에 숨어 계시도다”의 “더”는 혹 “너”의 인쇄 오식으로 본다손 치더라도 그 원문에 『Verelat tas』라던지 “아베베룸” 원문에 『Vere passum』이라던지 “Vere” 뜻이 “짐짓”이 아니고 “진짓”인 것을 생각할 때 자연 그 “불허복제”로서 ”감준한 감목”이 누구인가를 뒤져보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⑭ 86면=옛공과의 “원수의 작란이 심히 핍박하오니”의 이 “작란”을 새공과에는 버젓이 “장난“으로 짐직 고쳐놓았다. 그 의도를 알 길이 없거니와 여기도 필경 “작란”과 “장난”의 구별을 몰랐던 모양이다. “작란”이란 “난리를 이르킴”이요 “장난”이란 “아이들의 놀음놀이”를 뜻하는 것이다. 여기도 “오→살루따리스” 원문에 “Bella premunt hostillia”로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전후 문맥에 “심히 핍박하오니…… 용력을 주시고 도으심을 드리우소서”만을 본들 어찌 “장난”으로 고칠 생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⑮ 90면=새공과의 “오로지 하고”는 여기 한해선 “오롯이 하고”라야 말이 성립된다. 왜냐하면 “오로지”는 단순한 “어찌씨(副詞)”이지마는 여기는 분명한 “어떻씨(形容詞)”인 “오롯하다”의 “오롯하게”란 뜻이기 때문이다.

16. 91면=옛공과의 “다만 감히 마음으로 영할 것이니”를 새공과는 “영할지니”로 고쳤다. 우리말에 “할것이니”와 “할지니”의 뜻이 천양지별이다. “할것이니”는 공과의 말 그대로 “가히 할 수 있는 것”이요 “할지니”는 “마땅히 하여야만 되는 것(Should)”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 말하는 “신령성체”는 옛공과 대로는 “하면 좋으니”고 새공과대로는 “꼭 해야만 되니” 뜻이 되고 만다.

17. 94면=옛공과의 “삼가고 소심하여”를 새공과에선 “삼가고 조심하여”(332면에도)로 고쳤다. 그러면 “삼가고”는 무엇이며 “조심하고”는 무엇인가? 이것은 필시 “소심”과 “조심”을 분간 못한데서 나온 것인듯 하나 “조심”이란 “삼가다” 뜻이요 “소심”이란 세심(細心)”과 같은 뜻으로서 “꼼꼼하게 주의하는 마음·아주 잔데가지 마음을 씀”(Sceupulose·Conselentiose)이란 뜻인 것이다.

18. 104면=옛공과는 아니나 필자가 번역한 미사 상례편(常例篇 Ordinarlum Missae)에 있는 (필자 그때 “성체 성혈 축성”까지만 번역하고 그 남아는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서 중단했음) 교부신경(敎父信經)의 ”나 믿노니”를 새공과에는 모조리 “나 믿느니”로 고쳤다. 이 한마디에서 두가지 잘못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첫째 잘못은 “본론”에서 이미 그 본보기를 뵈었음과 같이 우리 “말·글”의 “문어체”와 “구어체”를 전연 무시한 것으로서 “하나니·먹나니” 등 “나니”는 문어체이고 “하느니·먹느니” 등 “느니”는 멀정한 구어체인 것이어늘 우리 옛공과 (그 아름다운 문어체)에다 틈틈이 구어체를 뒤섞어 놓았고 “하노니·하노라” 등 “노니·노라”는 자칭(自稱 즉 一人稱)에만 쓰이는 “베풂꼴”의 씨 끝에 붙는 “때 도움 줄기”의 특색이어늘 이것을 모조리 “나 하느니·나 믿느니” 등으로 해놓았기 때문이다. 이 “하노라·하노니”가 그 얼마나 우리 말의 “자칭(自稱)”을 표시하는가를 알려면 “부세(附洗)”하는 경문에 “내가 너를 씻기되…… 하노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경문에서서 “내가”가 빠지더라도 (마치 라띤말에 “밥띠소 Papitzo “때문에” 에고 Eg)”가 빠짐 같이)부세가 충분히 유효하다는 이론(理論)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아 이를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계속)

訂正

227호 첫단 마지막줄 「신비」 6단 둘째줄 「신비」는 각각 「신빈」으로 정정함.

朱在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