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기(상)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는 이승훈(베드로)이 1784년 중국 북경 북당에서 세례를 받으며 시작된 한국교회가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로 설정될 때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성직자다. 한국교회 초대 교구장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국교회 역사에서 초석이 됐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토록 바랐지만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조선대목구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선종했다. 또한 지금의 한국교회 신자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교회 초대 교구장으로서 남긴 발자취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욥 주교)는 4월 16~21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뒤 조선에 입국하려 거쳐간 발자취와 유해 이송로를 따르는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를 실시했다. 3회에 걸쳐 순례기를 싣는다.
■ 2000km 넘는 대장정
순례단은 서울 순교자현양위 부위원장 원종현(야고보) 신부와 직원들, 순교자현양회 조화수(바오로) 회장과 이래은(데레사) 부회장, 양두석(토마스) 전 회장 등 전현 회장단, 성지순례 안내 봉사자 등 20여 명으로 구성됐다. 순례단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브뤼기에르 주교가 고향을 떠나 아프리카를 돌아 동남아시아를 거치고 다시 중국대륙을 지나 조선을 향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걷고자 했다. 이동 거리는 총 2000km가 넘었다.
“조선 선교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고 그때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신자들이 사제 없이 불쌍하게 버려진 소식은 제게 그들에게 가고자 하는 큰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회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상황에 대해 남긴 글이다. 조선교회에 대한 선교 열망을 이미 지니고 있었지만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알려진 길이 없었기에 길을 만들어 내야 했던 시기에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가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거쳐 가야 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순례단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이라는 간절한 염원에서 중국대륙을 지나간 장소 중 1년간 머물며 사목했던 서만자(西灣子), 서만자에 도착하기 전 통과했던 만리장성, 마지막 기착지이자 선종 장소인 마가자(馬架子), 조선 입국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선종한 뒤 유해가 이송된 경로에 위치한 심양(沈陽)과 변문(邊門), 단동(丹東)을 주요 순례지로 정했다.
4월 16일 오전 7시 이제 막 어둠이 걷힌 시각, 순례단은 중국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포공항에 모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걷는다는 생각에 순례단의 얼굴에는 흥분이 감돌고 있었다.
순례단은 16일 오전 11시경 북경공항에 내려 명·청대 천문 기구를 관장하던 흠천감(欽天監)과 예수회 마테오 리치 신부가 세운 남당(南堂)을 둘러본 뒤 한국교회 첫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이 1784년에 세례받은 북당(北堂)을 찾았다. 이승훈이 북당에서 세례받음으로써 한국천주교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와도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기념비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원종현 신부는 한국천주교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고 초대 교구장 임명으로 교회의 초석이 놓인 사건의 의미와 관련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던 시기에는 신분이 존재를 규정했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구 설정이라는 교회사적, 제도적 의미에서는 물론 사회사상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 서만자성당에서 찾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흔적
순례단은 북경에서 219km 떨어진 장가구(張家口)로 이동해 하루 숙박한 뒤 4월 17일 오전 8시30분 만리장성 제1문이라 불리는 대경문(大境門)을 찾아 버스로 출발해 9시15분경 도착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을 향해 이동하던 중 서만자에 도착한 것은 1834년 10월 8일이었다. 서만자에 들어오기 전 만리장성을 넘은 것은 바로 전날이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지 정확히 3년하고도 한 달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그만큼 앞서간 사람이 없는 길을 만들며 가는 일이 험난했음을 알 수 있다.
순례단에게 만리장성은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만리장성을 바라보며, 브뤼기에르 주교가 만리장성 어딘가를 통과해 지나갔을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순례단이 만리장성 대경문을 출발해 약 30km 떨어진 서만자성당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였다. 현재의 서만자성당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건물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은 뒤 2009년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목하던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 성당 측면 한켠에 과거 성당 건물의 주춧돌이 보존돼 있다. 버스에서 내려 서만자성당을 올려다본 서울 순교자현양회 성지 안내 봉사자 이명애(소피아)씨는 “서만자성당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려 한다”며 “한국교회 신자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서만자성당은 큰 외형에 비해 내부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의 길 성화 외에는 성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쓸쓸한 풍경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당 바로 맞은 편으로 보이는 토굴과 신학교 건물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서 사목할 때의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토굴은 중국 지방 관리가 유럽에서 온 선교사를 체포하려 하자 브뤼기에르 주교가 일시적으로 피신했던 곳이며, 신학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그곳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서만자성당과 신학교가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신학교에도 그의 흔적이 남겨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학교 뒤편으로 서만자 지역에서 사목했던 성직자 묘역도 조성돼 있다.
순례단을 안타깝게 했던 것은 외형만 겨우 남아 있는 신학교 건물이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순례단이 서만자성당을 방문했던 날에도 신학교 건물 바로 옆에서 굴삭기가 땅을 파는 작업을 하며 모래바람을 심하게 일으키고 있었다.
순례단은 서만자성당에 도착할 때부터 ‘주위의 시선’이 순례단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단체 순례단이 서만자성당을 방문했다는 점에 예의주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서 사목할 당시 지방 관리들에게 받은 그 시선이었을지 모른다. 순례단은 서만자를 떠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다 선종했던 마가자로 떠날 채비를 했다. < 계속 >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