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간의 우애가 남달랐던 친정에 쓰나미 같은 불행이 밀려왔다. 중국에 무역하러 간 오빠는 사기를 당하고 해골 같은 모습으로 귀국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오빠를 보노라니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29~37) 복음이 떠올라 집으로 모셔 왔다. 정성을 다해 간병했지만 28차까지 가야 했던 항암치료는 희망과 좌절이 널뛰듯 하더니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이 와중에 막냇동생의 교통사고는 온 가족을 충격과 슬픔의 도가니로 빠트렸다. 경추를 심하게 다쳐, 전신마비가 된 동생은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에서 수술은 했지만, 평생 와상환자로 살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라마의 애끓는 통곡 소리가 내 심장에서 매일 터져 나왔다. 연이어 착한 올케의 유방암 소식에 눌려 있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당신이 전지전능하신 신이 맞아? 우리의 구원자가 맞냐고! 정녕 기적의 하느님이시라면,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사랑하는 내 동기간들을 살려보시라지. 침묵하면 다냐고, 나약하고 무능한 신, 나보다 못한 신!” 로마 병사보다 더한 모욕과 무시로 예수를 조롱했다.
환란 속에서 내 신앙의 민낯이 들통났다. 잦은 세파에 시달리는 내 팔자가 궁금해져 친구와 함께 유명하다는 역술인을 찾아간 것이다. 그분은 힘들게 살아온 내 삶을 다 맞췄고, 위로와 격려도 해주면서, 다신 오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성당에 열심히 다니라 했다. 보다보다 못해 역술인 집까지 쫓아 오셔서 회유하시다니, 주님이 옆에 계신 듯 소름이 끼쳤다. “귀환하라, 귀환하라, 귀환하라.” 주님의 선명한 메시지가 뇌리에 스쳤다. 바빌론 강가에서 시온을 그리워하던 히브리 민족처럼, 왈칵 주님 품이 그리워져, 빛을 향해 귀환 채비를 서둘렀다.
사실 고통과 불행은 대부분 나약한 인간들의 욕심과 어리석음에서 기인된 게 아닌가. 괜스레 주님 탓하고, 무시하며, 우상까지 섬긴 이 못난 죄인을 살려 주신 주님께 부끄럽고 감사해서 목 놓아 울었다. “주님,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인 죄, 용서해 주십시오. 알고 보니 제가 호세아의 고메르요, 회색분자 바리사이요,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요, 「침묵」의 주인공 기치치로였습니다. 다시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 후, 어둠에서 빛으로, 불평에서 감사로, 의혹에서 믿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건너게 된 영적 체험은 주님의 뭉클한 사랑이자 파스카의 신비였다. 오늘도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읊조려 본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리라.”
글 _ 김경자 엘리사벳(수원교구 제1대리구 신남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