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언양지방에 천주교 수용 창녕 성씨 문중 자료에 천주교와 관련돼 몰락한 사실 기록
부산교회사연구소가 연 제19차 학술연구발표회(13일)에서 발표한 손숙경씨의 논문은 조선후기, 정확히 말해서 1801년 이전에 경남 언양지방에 천주교가 수용됐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어 주목을 끈다. 발표 내용을 요약한다.
조선후기 언양지역의 초기 천주교 수용자들과 수용형태에 대한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새로 발굴된 창녕 성씨의 문중 자료는 언양의 천주교 수용과정과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자료는 '宗門契錄' '痛恨의 宣敎郎派宗家' '두고간 정한' '門中追錄' 등이다.
이 문서들은 문중의 특정 계파가 천주교와 관련되어 몰락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천주교의 입교 배경과 활동 상황도 엿보인다. 문서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이 지역의 향리 가계들의 천주교 수용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언양 지역 창녕 성씨 향반 가문에서 천주교를 수용한 인물은 성처인, 성진탁, 성철규이다. 성씨 가문은 모두 네 개의 파로 나뉘며 이 가운데 넷째 파인 '璡派' 가 천주교 사건에 연루돼 단절됐다.
'진파' 역시 천주교를 수용하기 전 중앙 문벌 양반과 통혼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적 위세를 유지했다. 언양지역에서 천주교와 관련해 읍치의 海州 吳氏 吏族 家門, 慶州 金氏 吏族 家門, 그리고 高靈 申氏 吏族 家門에서 신자가 배출됐고 이들중 일부는 박해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천주교를 수용한 부류가 이족 가문들이며, 이것이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박해의 절정인 병인박해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구전에는 해주 오씨 이족 가문의 오한우(1760~1801?)와 육촌 매제인 경주 김씨 이족 가문의 김교희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1790년경에 입교했다고 전한다. 이후 두 가문은 언양 지역 천주교 확산에 중심이 됐다.
자손들 가운데 천주교를 수용한 가계는 향리 사회에서 이탈되거나 상대적으로 고립되었음을 사료는 보여준다. 이외 언양지역 가문중 천주교를 수용한 집안은 고령 신씨 가문으로 전해진다.
천주교 수용에 관한 사실도 여성들로부터 가문의 비밀로 전해져 왔다. 이상에서와 같이 언양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향반인 창년 성씨 가문과 이족인 해주 오씨, 경주 김씨 가문 등 지역에 세거한 부류들이 천주교를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 선교사 없이 남인들이 학문을 통해 친인척과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인 것과 같이 언양의 천주교 수용도 지역의 향반들과 이족들이 중앙과의 학문적인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