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과 한국교회] 프랑스 선교사들, 교회 보호 위해 신자들의 독립운동 감시·제재 대구 신학생 60명 등 개인 자격으로 자발적 만세운동 나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10년 합병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 이 시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뤘던 천주교회는 교회를 보호할 목적으로 정교 분리를 내세워 민족 운동을 금지하고 일제 총독부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별히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의거를 경험한 지도층은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감시하고 제재했다. 때문에 천주교의 독립운동은 전 교회적으로 참여하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저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제약과 한계를 지닌 상황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의 만세 운동은 적지 않았다. 삼일절을 앞두고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을 살펴본다.
구한말 천주교의 항일 움직임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가 요구한 정교 분리 요구에 적응하면서, 정치 불간섭주의를 통해 폭력을 수반한 무장 투쟁을 원칙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이때 천주교의 민족운동은 신자 개인적으로 양심적 차원에서 무장 투쟁 운동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으나, 교육·언론에 주된 관심을 두는 비폭력 애국 계몽 운동에 초점이 맞춰졌다. 교육과 언론을 통한 운동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더욱 확대됐으나, 1908년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발표하고 민족 교육 운동을 탄압하면서 교회 학교는 반 이상이 폐쇄됐다. 그럼에도 ‘승공학교’와 ‘승신학교’ 설립 등으로 이어진 교육 운동은 근대화와 국권 수호를 위한 애국 계몽 운동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향신문’ 등을 통한 언론 구국 운동, 서상돈(아우구스티노) 등이 발의한 국채 보상 운동 등도 일제의 침략을 막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의미가 컸다.
또 1904년 일제가 황무지 개간을 명분 삼아 토지 수탈을 시도하자, 신자들은 서울 명동성당에 모여 반대 기도회를 개최했다. 원재연(하상 바오로) 박사는 「경향잡지」에서 이를 “근대에 들어와 한국 천주교회에서 최초로 교회 밖 사회 문제에 집단으로 반응을 보인 사회 참여이자 민족 운동”이라고 말했다. 신자의 자긍심으로 항일 의병 운동에 참여해, 애국정신을 보인 이들도 있다. 의병 전쟁에 참여하면서 매일 하느님께 기도한 것으로 알려진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1907년 정미의병 당시 경상도 의병장 김상태가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군에 체포돼 사살될 때까지 몸에 묵주를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3·1 운동과 만세 운동
1919년 3월, 고종의 국장 및 및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주창 등에 영향을 받은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 등은 신자들이 이 움직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으나, 신자들은 민족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교회가 금지했지만, 개인 자격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제일 먼저 행동을 보인 곳은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였다. 60명의 신학생은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 운동장에 모여 ‘독립가’를 불렀다. 이후에는 3월 8일 대구 시내 군중 시위를 대비해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나 학교 측에 압수됐다. 이를 보고받은 당시 대구대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무조건 순명’을 요구하면서 “만세 운동 가담자는 퇴학시키고 신학교도 폐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신학생들은 수업에 불참하고 4월 3일 만세 운동 참가를 계획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드망즈 주교는 학생들의 만세 운동 참여를 우려해 조기 방학을 실시했다.
용산성심신학교 학생들도 그해 3월 23일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질서를 지키라’고 훈계하는 뮈텔 주교에게 ‘일본인에게 짓밟힌 조국을 외면할 수 없다’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뮈텔 주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운동 참여를 금지하고 징계 조치로 그해 서품식을 연기했다.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다. 신학생들의 만세 운동 참여는 이처럼 조기에 힘을 잃었다. 성직자가 되려면 만세 운동을 포기해야 했던 고민이 드러난다.
3·1 운동 즈음에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다녔던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일화도 있다. 김 추기경은 교사들로부터 일제의 식민 통치 만행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강의를 들으며 민족적 울분이 치솟곤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신학교 시절, 수신 과목에서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 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오자, 고민하다가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라서 천황의 칙유에 대해 소감이 없다”는 답안을 제출했다. 이후 교장에게 불려 가 뺨을 맞고 심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일반 신자들의 참여
3·1 운동은 시간이 흐르며 전국적으로 확산했는데, 3월 10일 황해도 해주에서 봉기한 만세 운동에는 개신교와 천도교, 불교 신자들과 더불어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했다. 이 일로 4명의 천주교 신자가 해주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3월 18일 강화 장날 시위에도 김용순과 조기신을 비롯한 신태윤 등의 천주교 신자가 참여했다. 경기도 광주와 용인, 황해도 신천, 경북 대구 등지에서도 천주교 신자가 주도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5월 말까지 만세 운동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는 50여 명으로 집계된다.
북간도 용정에서 일어난 3·13 만세 운동도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사례다. 정오에 울린 성당 종소리를 신호로 1만 명 이상의 군중들이 용정 시내에 모여 ‘독립 축하회’라는 이름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천주교회 회장인 김영학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후 시가행진을 시작했으나 중국 경찰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했다. 이외에도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간도를 비롯한 중국 등 해외에서는 교우촌 대교동의 교향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장백현 신자 30여 명의 혜산 일본 경찰서 습격 등 무력 항쟁이 있었다.
전남대 윤선자(도미니카) 교수는 「경향잡지」를 통해 “만세 운동 사례만 볼 때, 3·1 운동에 참여한 천주교 신자는 대부분 공소 신자였다”며 “이는 선교사와 한국인 성직자들의 신자들에 대한 제재 빈도나 강도가 본당보다 약한 공소 신자들이 주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만세 운동 참여는 위계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구조적인 제도, 또 교회가 현실 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영성 생활을 저해한다고 이해한 이원론적인 신앙 구조 속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안성본당의 앙투안 공베르 신부, 수원본당의 폴리 신부,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 은율본당의 윤예원(토마스) 신부 등은 독립운동에 협조하거나 직간접으로 개인 차원에서 지원한 성직자들로 꼽힌다.
윤선자 교수는 ‘3·1 운동 전후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이라는 글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만세 운동 참여는 개신교나 천도교에 비하면 소수이지만, 한국 천주교회를 관할하던 외국인 선교사들과 대부분의 성직자가 적극 만류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져 의미가 크다”고 밝히고 “한국 천주교회가 한국인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