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유럽 동방정교회 수도원 순례기 (3·끝) 몬테네그로·크로아티아 지역

가톨릭의 나라 크로아티아의 ‘천국 도시’ 두브로브니크 전경. ■ 바위산의 파노라마 몬테네그로 암벽수도원우람하게 깎아지른 석회암벽 사이로 흐르는 급류와 침엽수림길이 지그재그로 휘도는 아름답고 웅장한 산 속에는 흰 감자꽃밭 외에는 별다른 농작물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산을 의미하는 몬테네그로는 주변국 내전에 개입하며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2006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하였다.11세기 십자군원정은 이슬람이 점령한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는 기치 아래 8차례 출정하는 동안 발칸지역을 지나가며 물자를 조달하고 약탈과 만행을 저질러 동방교회의 원망과 불신과 배신감을 깊게 했다. 십자군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만 터키군이 올라오고, 점령 당한 발칸은 고난의 시대로 접어들며 동방교회는 쇠퇴의 길을 걷고 저항과 순교가 이어졌다. 요한 바오로2세는 동방교회를 향한 십자군에 대한 사죄로 참된 종교인의 자세를 보여주었다.동로마시대 교통의 요충지였던, 2천 급 산줄기들로 빙 둘러싸인 수도 포드고리차 인근에 있는 오스트로그암벽수도원은 몬테네그로인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이다. 헤르체고비나대주교 성 바실리예는 오스만군을 피해 수도자들과 함께 1665년 제다계곡 깊숙한 900m 바위절벽 동굴에 오스트로그수도원을 세웠다. 바실리예의 유해를 모신 바위벽 성십자가 동굴성당에는 연간 백만 명이 넘는 순례자가 방문하여 다양한 기적을 체험하는 회개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수도원까지 2.6㎞ 산길계단을 오르는 여자들은 긴 스커트에 어깨까지 수건을 휘감아 예를 차리고 우리는 셔틀버스로 편하게 도착했다. 1671년에 떠난 성인을 뵙기 위해 긴 줄을 서서 고요히 기다리는 순례자들 뒤로 청록의 제다비탈은 향냄새로 은은했다. 성수와 초를 구입하는 사람들로 줄은 다시 길어졌다. 기적수로 이름난 성수와 동굴방에 소망의 촛불을 밝히는 것은 순례자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다. 수많은 촛불이 타는 방에서 잡다함을 태우고 바위절벽에 달라붙은 신앙을 얻어 영혼을 맑게 하는 그들을 보며 우리도 확고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기적을 기대했다. 포탄이 박힌 동굴성당에서 성 바실리예의 관에 친구하는 깊은 사랑은 지나는 이의 차가운 마음을 녹여주고, 성인께 편지를 쓰는 순례자들 틈에 끼어 좁은 베란다 포도나무에 달린 송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단단한 가지가 되도록 한글 편지를 적었다. ■ 아드리아해의 낭만 사비나수도원높은 산맥을 넘고 넘어 나타난 아드리아해를 따라 지상의 낭만을 더해준다는 헤르체그노비 근교에 있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사비나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감동 그것이었다. 1030년 오스만군을 피해 헤르체고비나 주교가 자리 잡은 후 중세 세르비아 왕들의 유물을 보관한 수도원 정원에서 보는 바다는 프레스코화의 두꺼운 어둠을 걷고 얇은 보석같이 빛났다. 수도자들의 삶은 고요한 바람처럼 스며들고 유일하게 남은 성모 이콘은 지극한 공경을 받고 성모자 이콘에는 손이 하나 더 있었다. 다마스쿠스 성 요한은 터키군에게 손이 잘려 아토스산 수도원에 보관된 후 성모화에 그려 넣는 전통이 생겼다. 두세 명의 수사가 생활하는 사비나수도원은 시리도록 푸른 아드리아해와 함께 추억이 되었다.휴가지에 몰려든 차량들로 심한 정체를 이룬 헤르체그노비의 오래된 좁은 골목과 성곽과 상점이 총총한 비탈진 구시가지 앞 바다에 검은 구름덩이가 거꾸로 날리는 깃발처럼 내리꽂히고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며 폭우가 퍼부었다. 도로는 급류가 되고 굵은 비는 풍경을 막으며 산의 나라 몬테네그로에서 우리는 하늘세례를 듬뿍 받았다. ■ 가톨릭의 나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죽기 전에 보아야 한다는 두브로브니크, 지상의 천국, 아드리아의 진주에 대한 꿈을 안고 부겐빌레아가 커튼처럼 드리운 헤르체그노비를 떠나 보스니아를 거쳐 찬란한 태양과 짙은 바다를 따라 정교회의 땅 끝, 가톨릭나라 크로아티아로 들어섰다. 베네치아와 경쟁하며 막강한 부를 축적한 두브로브니크는 유럽인이 선망하는 휴양지로 성채와 성벽과 수도원, 종탑과 교회와 건물들이 도시의 영화를 담고 달마티아지방 문화예술 중심지로 길이 2㎞, 높이 23m 성벽을 두르고 있었다. 성 블라시오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지상 천국순례는 발칸 정교회의 구불거리는 산길을 지나 고향에 닿은 순례자처럼 감회 깊었고, 사랑의 삶에 대한 강론은 천국도시의 강렬한 메시지가 되었다. 아르메니아 귀족출신인 목병의 주보성인 블라시오십자초에 순례단은 축복을 받았다. 성당모형을 든 은조각상은 귀한 보물로 1706년 화재에서 유일하게 남아 이 도시의 전통이 되었다. 14세기 건축물로 역사적 자화상이 된 프란치스코수도원의 르네상스풍 웅장한 현관을 지나면 유럽 최초의 약국이 지금도 운영되고, 제약박물관에는 중세 약 제조법 서적과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대 서적 필사본과 초판본이 소장된 수도원은 프레스코화와 섬세한 기둥장식과 정원이 유명하고 스트라둔 입구 성벽을 따라 길게 서 있다. 햇볕 따가운 오후, 10세기에 건설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벽 위에 오른 순간, 도시와 아드리아해와 산과 하늘-그곳은 지상의 천국이었다. 중세적 기풍과 위엄을 지닌 프란치스코수도원과 도미니코수도원의 덩치는 압도적이고 석조계단이 우아한 도미니코수도원은 아드리아해에서 가장 큰 고딕건축물로 문화유산을 대표하며 두 수도원의 ㅁ자형 건물과 정원은 시대를 초월한 지상의 예술품이었다. 대성당과 종탑, 궁전과 요새와 스트라둔거리 인파들, 오르막 빼곡한 골목 속의 삶들이 숱한 세월을 지나 눈앞에 펼쳐지는 중세도시는 긴 시간 역사 속에 만들어지고, 충만하게 빛나는 여정을 그득히 담은 저녁 석양은 천지를 물들이며 아드리아해와 하늘을 마음껏 불 질렀다. ■ 크로아티아 중세 해변도시로마황제가 된 달마티아 천민 출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건설한 유네스코 문화유산 스플리트의 거대한 궁전을 둘러보고 그리스인들이 2300년 전 정착한 발칸의 작은 베니스 역사유적지 트로기르로 갔다. 그리스와 로마, 베니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트로기르에는 복잡한 미로가 거미줄처럼 이어지고 크로아티아 최고 걸작 성 로렌스 성당과 도미니코수도원이 있다. 수도원의 돋을새김 검은 목재조각의 높은 천장 성당에는 수도승의 침묵이 수 세기 동안 배어있고 진리를 수호하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주님 오심을 준비한 수도자의 원형인 세례자 요한의 삶을 따르라는 강론을 새기며 시베니크로 떠났다. 아드리아해안의 비탈진 골목과 계단과 상점과 광장들이 많은 시베니크의 성 야고보성당은 달마티아 건축가 유라이 달마티나츠가 독특한 기법으로 개축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사기간이 100년 이상 걸렸으며 성당 외벽의 달마티아인 71명의 얼굴조각상은 도시의 명물이 되었다. 요새 아래에 있는 교회의 사이프러스 사이로 내려다본 해변의 빛바랜 풍경은 순례 끝의 서운함을 더해주었다. ■ 발칸에 기쁨과 평화의 축복을!발칸을 떠나며 스플리트 구시가지 성 필립보 네리성당을 찾았다. 500년 전 교회가 고통을 겪을 때 기쁨과 희망과 행복의 이름 네리 사제가 나왔다. 몬테카시노수도원에서 깊은 감동을 받은 그는 마흔 살에 사제가 되어 가난한 이웃에게 기쁨을 전하며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었다. 네리성당에서 바치는 마지막 미사는 발칸의 아픔을 지나온 상징이 되었다. 종교로 인한 고난의 역사가 마감되고 오직 사랑과 평화의 축복으로 동방정교회 형제들이 아름다운 대자연에서 네리 사제의 기쁨과 행복을 나누며 하늘의 보석으로 반짝이기를 기원하며, ‘나’를 통해 하느님이 나눌 수 있는 희망을 안고 우리는 발칸순례를 마감했다. 헤르체고비나대주교 성 바실리예가 오스만군을 피해 900m 바위절벽 동굴에 세운 오스트로그암벽수도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플리트의 궁전과 종탑.아드리아해를 바라보고 서 있는 사비나수도원.

입력일 2014-09-30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유럽 동방정교회 수도원 순례기 (2) 세르비아 지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세르비아 스타리 라스의 슈투포비(Stupivi)수도원 전경. ■ 발칸의 화약고, 세르비아 중세 수도원1차 대전 발발 100년, 전쟁의 불씨가 된 역사적 장소인 세르비아는 1·2차 발칸 전쟁과 십자군 원정, 오스만 터키 점령 등 피비린내 나는 발칸의 화약고였다. 이슬람지역인 크랄레보와 중세수도 스타리 라스 일대의 정교회수도원은 수백 년 동안 전쟁을 겪은 비운의 상처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옥수수밭이 이어지는 풍요로운 평원을 지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고향 니슈에서 본 국가대표 농구선수들은 건장하고 준수한 전사 같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강변에 있는 대제의 기념물에는 그리스도교 표지가 새겨져 있었다.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그는 꿈에 본 그리스도의 표지 깃발을 앞세워 로마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로마 황제로 즉위한 후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 어머니 헬레나는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주님의 흔적을 찾아냈다. ■ 세르비아 겨자씨크랄레보의 성 미카엘 성당은 세르비아 가톨릭의 현주소를 보여주었다. 지진에 갈라지고 무너진 폐허 같은 작은 벽돌성당에서 천장과 벽은 금이 가고 회칠은 벗겨지고 제대 뒤에는 작업도구와 목재더미가 흙먼지에 덮여 있었다.정교회 땅 가톨릭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안타까움이 더 컸다. 동방교회 속에서 5%의 세르비아 가톨릭신자들은 차별을 받으며 가난하게 신앙을 이어왔다. 번영의 신앙을 지양하라는 교황의 말씀이 절실해지는 이 작은 교회는 세르비아의 겨자씨로 하느님의 가난의 실체를 보여주었다.신비적 색채와 민족문화의 특색이 강한 동방정교회는 수도자 외의 성직자는 결혼하며 전례는 장엄하고 아름답다. 성경은 구약 49권으로 총 76권이며 무염시태를 믿지 않고 예수는 새 아담의 창조로, 성모승천은 성모안식으로 표현했다. 이콘과 성화를 서방교회가 문제 삼자 파괴하고 니케아공의회에서 허용한 후에 서방은 입체적 성상을, 동방은 성화를 그렸다. 칠성사를 지키며 영혼구원에 중점을 두고 세상을 부정하는 부정적 신학관과, 원죄의 신화신학을 주장하며 정적관상과 직관으로 영적 삶을 실천하였다. 동방수도원은 은수자들의 삶이 이어져 14세기말 그리스 아토스산을 중심으로 수도원이 늘어나며 성 바실리오 규칙을 지켰다. 주일미사에 대한 의무는 없고 지역 성인을 공경하는 전 세계 3억 명의 신자는 정통신앙을 수호한 긍지를 지니고 있다. ■ 중세 세르비아의 보석- 치차와 스튜데니카수도원스테판 1세가 아들 사바를 위해 13세기 초에 세운 치차수도원에서 7명의 왕이 대관식을 치러 크랄레보는 왕의 도시로 불렸다. 열일곱 살 세르비아 왕자 사바는 결혼식 전날 그리스 아토스산 수도원으로 떠나 수도승이 되었다. 선홍색 밝은 지붕에 붉은 벽돌 수도원은 푸른 하늘 아래 파란 풀밭과 들꽃, 연못, 나무들 속에 화려하게 서 있었다. 웅장한 성당 프레스코화는 오스만 침략과 세계대전으로 60%가 파손되었으나 복구비용이 없어 그대로 두어 벽에는 대부분 붉은 빛만 남아 있었다. 전쟁의 상처는 죄 없이 희생된 마을 공동묘지에도 잠들어 있고, 수백 년 이어진 포화의 악몽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수도원을 뒤흔들었다. 대관식 때마다 세운 7개의 문이 있는 담장 안에 둥치 큰 나무들이 높이 자라고 열린 창문으로 엿본 수녀원의 정갈한 방과 포도밭에서 일하는 작업복수녀는 순례자의 호기심을 끌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속에 찾아간 중세 세르비아의 보석으로 알려진 스튜데니카수도원은 단단하고 예술적이며 중세적 풍치가 압도적이었다. 스테판 1세의 명으로 12세기에 건축한 수도원에 사바 성인은 아토스 화가들을 시켜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장식하였다. 이슬람 군이 물러간 후 파손된 그림을 칼로 파내어 복원하던 중 원형이 파괴되자 중단한 그림에는 흰 상처가 연속무늬처럼 남았다. 최후의 만찬화에 빵을 집는 유다가 유독 부각되었고 지성소 성화는 금빛 바탕에 환상적인 푸른빛의 청금석을 사용하여 신비한 하늘세상을 표현했다.83세의 스테판이 군주자리에서 물러나 수도승이 되어 아토스산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자 사바는 세르비아로 아버지를 모셔와 비잔틴양식과 로마네스크를 절충한 벽돌로 쌓은 수도원의 원통형성모성당 영묘에 안치하고 차분한 색으로 장식하였다. 스테판 1·2세 관은 1년에 두 번 개관할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난다고 한다. 형제의 왕권 다툼을 중재한 사바는 정치적 안정과 농업장려로 경제적 안정을 가져왔고 1209년 초대 대주교가 되어 세르비아교회 독립을 실현하여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비가 그친 파란 하늘은 세르비아 앞날을 알려주는 듯 수도원 마당에는 상쾌한 바람이 지나갔다. ■ 중세 수도 사바의 고향 스타리 라스티스차강변 노비파자르는 이슬람 도시이며 인구의 3%가 이슬람신자이다. 라마단이 끝난 저녁, 성장한 어른들과 아이들은 중심가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말로만 듣던 이슬람축제가 시작되는 밤을 지나 서구와 비잔틴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세수도 스타리 라스 주변의 수도원을 방문했다. 이슬람 지역인 이곳은 오스만 터키의 지배 흔적이 곳곳에 남아 옛 수도원은 거의 파괴되었고 정교회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구릉을 휘감아 오른 800m 산정에 있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조르제비(기둥)정교회수도원에서 수도원장의 안내로 수도원을 돌아보았다. 성당 입구의 18m 돌탑기둥에서 수도원의 이름이 생겼고 오스만 점령 하에 폐허가 되어 성당 지붕은 없어지고 300년 비바람에 프레스코화 몇 점만이 남아 있었다. 3년 전 복원한 수도원의 무너진 돌담 사이로 멀리 계곡이 나타났다. 수도원순례에서 인간의 흥망성쇠를 직접 대하며 참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네마나 왕조가 시작된 사바의 고향 라스는 골짜기 외딴 마을로 남아 보는 이를 씁쓸하게 하였다. 라스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베드로와 바오로 정교회성당 사제는 이슬람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미워해서는 안 되지만, 악과 거짓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스타리 라스 산속 스포차니수도원은 오스만의 점령으로 250년간 폐허로 버려졌다. 세르비아 스포차니수도원 성당 벽면의 프레스코화.슈투포비수도원의 수사.세르비아 치차수도원 전경.

입력일 2014-09-23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유럽 동방정교회 수도원 순례기 (1) 그리스·불가리아 지역

613m 바위기둥 절벽에 세워진 대 메테오라 수도원. 146개 돌계단 끝에 새겨진 ‘천국의 것을 바라라’는 글귀는 순례자에게 정화의 시간을 준다.그리스 메테오라 발람수도원을 찾은 순례자들. 지난 2006년부터 유럽 수도원 순례를 통해 가톨릭교회 영성의 근원 자리를 찾았던 가톨릭신문이 7월 23일~8월 4일 10차 순례를 실시했다.특별히 그리스, 불가리아 등 발칸지역 동방정교회 수도원 방문 여정으로 마련된 순례를 노춘석(멜라니아·창녕공고 교사)씨 후기로 3회에 걸쳐 소개한다. ■ 신화의 땅에 핀 그리스 메테오라 동방정교회발칸지역 동방정교회 수도원을 돌아보는 제10차 수도원 순례는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등 옛 유고연방지역을 순례하며 종교로 인한 아픈 역사를 밟았다. 순례기간 내내, 동서방 교회 분리 후 서로 낯선 이방인으로 외면한 시간을 돌아봐야 했다. 폴란드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랑과 평화의 간절한 호소를 들으며 종교의 의미와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증오, 갈등, 그리고 분쟁의 얼룩진 역사를 보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할 수만은 없는 송구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인류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고 수많은 신화가 떠도는 땅, 동방정교회의 신비한 수도원 이야기가 있는 땅, 철학과 호메로스, 사포와 올림픽, 빛나는 햇살과 신전이 있는 그리스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모든 것을 맡겼다.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순례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평균 300m 높이의 기암괴석 파노라마가 70여 리 이어지는 메테오라는 유네스코 문화자연유산으로 공중에 떠있는 수도원을 의미한다. 11세기부터 은수자들은 세상과 외떨어진 핀두스 산맥 속 피니오수 강이 흐르는 하늘 기둥에 올라 바위벼랑에서 살았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내려가는 삶이 아닌, 하늘의 삶을 올려다보면서 도르래로 끌어올린 최소한의 물자로 거친 바람과 추위,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금욕적이고 가난한 바위 위 영적 풍요를 이루었다. 절벽 위 수도원은 아찔하도록 험한 곳에 있었다. 무엇이, 왜, 이곳으로 그들을 끌어올렸을까?14세기 초, 성 아타나시우스가 대 메테오라 수도원을 연 후, 13개의 대수도원과 20여 개 은수처를 세워 15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여자들의 출입을 허용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도 여자들은 수도원 입구에 준비된 치마를 둘러야 들어갈 수 있다. 하늘에 닿은 대 메테오라 수도원과 발람, 루사노, 스테파노,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힘들게 오른다는 성삼위(트리니티) 수도원을 이틀 동안 순례했다. 첫날은 푸른 하늘 흰 구름과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빛나는 메테오라를 보았고, 둘째 날은 귀한 부슬비를 맞으며 검은 구름이 깔린 어둡고 음산한 모습을 만났다. 대부분 수도원은 오랫동안 도르래를 타고 올라가야 했고 계단과 다리를 놓아 일반인이 출입한 것도 최근부터였다. 메테오라 수도원 성당의 천장 돔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래는 복음사가와 사도들, 성인들이 프레스코화로 장식돼 있다. 수도회가 따로 없는 정교회수도원 구조는 비잔틴양식을 따라 대부분 비슷하게 이뤄졌다. 성화는 수도승들을 관상세계로 이끌며 하늘나라를 바위 봉우리에 펼쳐냈고 그들의 깊은 신심은 순례자에게 전해져 전율을 주었다. 산기슭에 바위기둥 하나를 잡고 서 있는 알바니아 정교회 루사노 수녀원의 작은 꽃밭에는 수도승을 닮은 고운 꽃이 피었고, 프레스코화로 만나는 하늘나라와 수도원 창문으로 내다본 산 아래 마을과 계곡은 초록에 묻혀 평화와 환희를 주고 있었다. 접근이 쉬운 성 스테파노 수녀원은 보존상태가 제일 좋아 많은 순례자로 붐볐다. 대 메테오라 수도원의 146개 돌계단 끝에 새겨진 ‘천국의 것을 바라라’는 글귀는 613m 바위기둥 절벽성당에 오른 순례자에게 지난날을 돌아보는 정화의 시간을 주었다. 성당 첫 방은 정화와 교리실, 중간방은 신자들이 두 시간 이상 서서 미사를 드리는 성당이며 안쪽은 사제가 들어가는 지성소로 세 방은 성경 말씀 프레스코화로 채워져 있다. 다만 성체를 모신 감실은 정교회 성당에는 없었다.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유쾌한 정교회 사제 세 분을 만나며 문득 벼랑 위 옛 은수자들이 그리워 높은 절벽 위 성삼위 수도원을 찾아갔다. 한국 순례객은 처음 맞이한다는 이곳은 밧줄 사다리나 광주리에 사람을 담아 끌어올렸다. 1925년 돌을 쪼아 140개 계단을 만들었고 제임스 본드의 007영화 추격 장면에 나와 유명세를 탔다. 1476년 도메티우스 수도승이 세운 수도원 입구에 빗물로만 생활하던 옛 생활을 보여주는 큰 물항아리가 있었다. 자비의 성모 이콘은 신앙을 멀리한 이들의 오감에 호소하는 슬픈 눈빛으로 떠나는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교회수도원의 성모님은 유독 비탄에 젖어 보는 이를 아프게 했다. 신비의 수도원은 세상의 호기심이 되고, 천년의 비바람에도 꿋꿋하게 하느님을 찬양하는 수도승들이 바친 기도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다.비가 그치고 맑은 기운이 퍼지는 바위산에서 메테오라는 신화의 땅에서 세상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새로운 신화를 순례단에게 보여주었다. ■ 동방교회의 어머니, 불가리아 릴라수도원불가리아정교회는 한때 동방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민족주의적 이단으로 몰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부터 파문당했던, 불가리아적 색채가 강한 정교회이다. 릴라수도원은 불가리아의 정신을 대표하는 곳으로 동방교회의 어머니이며 이슬람 저항 본거지로 불가리아 신앙의 뿌리이다. 릴라산맥 최고봉이 올려다 보이는 1150m 수려한 산중에 자리잡고 있다. 10세기 릴라의 성 요한으로 불리는 이반 릴스키 수도승이 은수 수행을 하며 야생동물과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행하자 깊은 계곡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도원은 제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자리를 잡아 14세기를 지나면서는 요새처럼 튼튼하게 건축되어, 오스만 터키 점령 때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500여 명에 달하는 수사들을 양성, 신앙과 민족 정신을 전파시켰다. 가혹한 탄압에 저항하며 하느님께 의지한 불가리아 정신은 릴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돔 지붕 24개의 성모대성당을 가운데 두고 성벽 양 날개처럼 빙 둘러 선 회랑 4층 건물은 석조와 목조로 건축하여 섬세한 난간 조각품과 얼룩말 무늬 아치형 기둥이 줄지어 미의 극치를 이루었다. 19세기 프레스코화 1200여 점을 품고 있는 화려한 성당에서 불가리아인들은 옛 방식으로 기도하고, 사제는 성수를 듬뿍 뿌리며 성물을 축복하는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특히 최고의 공경을 받는 이반 릴스키 성인의 유리관에 입 맞추는 사람들 모습은 순례자를 경건하게 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릴라에는 4명의 노수사가 객실을 운영하며 방문객을 맞기에 바빴다. 순례단은 불가리아의 맥을 이어 불굴의 정신으로 영혼의 장수국이 되게 한 릴라의 아름다운 산중에서 거룩한 기도로 나라를 구한 열렬한 애국자들을 생각했다. 산, 릴라의 신념, 프레스코화의 강한 기운을 받은 우리는 청청한 개울물 소리를 반주 삼아 미사를 봉헌했다. 회오리 바람에 실린 세찬 소나기가 숲을 흔들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 우리들 마음 속의 가라지를 뽑아내셨다. ■ 보야나의 삼나무 숲“나는 이 역사 안에 어떤 가치로 사는가?” 소피아 정교회성당을 순례하며 신부님이 주신 과제를 안고 가격이 가치로 혼돈되는 시대에 영원한 가치를 품은 보야나 성당을 방문했다. 소피아 외곽 삼나무 숲 속 작은 석조성당 보야나는 왕가의 별장지대에 위치하여 왕족들의 사적 기도처로 1048년 건축되었다. 시대가 다른 세 동의 건물을 하나로 잇는 둥근 지붕 그리스 십자형 평면이 특징인 중세 성당은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고 89개 장면에 개성을 살린 240명이 넘는 인물의 그림이 유명하다. 중앙 벽화는 심하게 손상되어 유네스코 지원으로 복원 중이었다. 작은 성당 벽화에는 12살 예수가 성전에서 어른의 눈매로 토론하고 아들을 찾은 요셉과 마리아가 조심스레 서 있는 환희의 신비 5단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성모자화의 애절한 눈빛은 순례자를 참된 가치와 감동으로 이끌었다. 거대한 삼나무 정원에서 고풍스런 보야나의 정취에 끌려 하느님의 든든한 가치가 되고 싶은 순례단은 불가리아 영혼의 씨앗을 가슴 깊이 묻었다. 불가리아의 정신을 대표하는, 동방교회 어머니이며 불가리아 신앙의 뿌리 릴라수도원.

입력일 2014-09-16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제9차 유럽 수도원 순례 참가기] (3·끝) 이탈리아 지역

■ 이탈리아 베로나, 마돈나 델라 코로나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는 마침 열린 교구장 착좌식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인파와 행렬과 깃발과 음악, 소년과 성인 합창단의 전례가 중세영화처럼 장엄하게 펼쳐졌다. 화려한 행사를 뒤로 하고 6시간을 달려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인 이탈리아 베로나에 도착했다. 물살 센 아디제강 오래된 다리를 건너 두오모성당으로 가는 길은 비좁고 집들은 무너질 듯 세월에 낡았다. 웅장한 벽돌색 성당은 1139년 재건한 로마네스크양식과 내부 고딕천장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종탑은 세 시대를 거쳐 완성, 천장에는 성모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의 놀라고 긴장한 원근법의 16세기 그림이 있다. 교회 건축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베로나 두오모와 노란 벽과 붉은 지붕의 고풍스런 베로나에 매혹된 순례단은 마돈나 델라 코로나 700고지 성모성지를 향한다. 지도신부님은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의 김정훈 부제의 마음으로 훌륭한 대자연을 묵상하며 순례하란다. 바람 센 높은 산 동굴에서 성 제노와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들이 1200년대 초 은수생활을 시작하며 절벽을 파 성당을 짓고 15세기에 로도스기사단이 여기 머물며 1432년 로도스에서 제작한 통고의 피에타상을 모신 후 순례와 기적이 이어진다. 1527년 오스만의 점령으로 성당은 허물어지고 빼앗긴 피에타는 17세기에 찾는다. 바로크성당은 1600년대에 완공, 나폴레옹 점령 후 베로나 교구가 관리하여 19세기말 확장한 후 아름답게 꾸민다.베로나 마돈나 델라 코로나 성지의 통고의 피에타상.소성당 스무 칸 정도의 고해소에서 순례자들은 죄를 씻고 맑은 공기로 영혼을 채워 통고의 성모님을 만난다. 교황 비오 10세와 복자 요한 바오로 2세가 순례한 이곳은 전대사 성지이다. 당시는 큰길이 없어 계곡의 900계단을 올라야 했다. 르네상스에 많은 영향을 준 지오또의 프레스코화가 있는 작은 방을 거쳐 성모칠고경당 창문으로 저 아래 아득한 계곡과 먼 풍경이 장관이다. 대성당 벽은 바위절벽 그대로이고 흰색 천장은 높고 둥글고 훤하다. 고딕의 뾰족한 첨탑은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나무로 숲이 되어 거룩한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된다.십자가에서 내린 아들을 안은 성모님을 바라보는 순례단 표정은 깊은 아픔을 함께한다. 상처투성이 어머니께 무엇을 소원하랴? 겨울의 깊은 침묵 속에서 찢어지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여 하늘만 쳐다보는 어머니를 두고 은은한 소나무 향기 속에 십자가 길을 바치며 수월하게 내려온 길을 오르자니 숨이 찬 순례자들은 겹겹의 산줄기들을 보며 14처에 새겨진 사실적인 예수님이 땀이 나도록 절절하다. 제노 성인의 믿음과 마돈나의 사랑이 세상으로 전해지는 마돈나 델라 코로나는 멀어진다. ■ 성 베네딕토의 산, 수비아코오래전부터 수비아코는 신비였다. 파도바의 쁘랄리아수도원, 피렌체, 로마 성 안셀모수도원과 바오로대성당 등을 순례하고 깊은 골짜기 벼랑에서 성 베네딕토가 하느님 사랑에 빠진 기도의 산으로 향한다. 해발 410m 수비아코 마을을 지나자 구불대는 산자락마다 성인의 역사와 자취가 축복처럼 서렸다. 나무 한 그루 예사롭지 않고 산위의 십자가는 수비아코성당을 마주 본다. 수도원 첫 마음 출발지인 수비아코, 하느님 외에는 어떤 것도 소용없다며 한 계단씩 다가가는 깨달음의 길로 험한 절벽을 오른 길, 절벽을 평지로 만든 공동체의 규범 베네딕토 규칙서는 모든 수도원의 모범이 되고 1500년 전통으로 내려온다. 정주생활의 수도회를 창설하고 기도하며 일하라는 가르침을 준 엄률의 성인에게 여동생 스콜라스티카는 사랑의 하느님을 알게 한다. 도토리알을 밟으며 올리브숲을 지나 마지막 좁은 문의 계단길이 끝나자 눈앞에 딱 나타나는 수비아코수도원. 바위벼랑에 달라붙은 수도원은 수도자의 길을 말해준다. 3년 동안 성인이 바위굴에서 수행할 때 저 위에서 빵바구니를 절벽으로 내려준 수사의 일이 궁금한 세상의 우리들. 베네딕토 성인과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무덤 위에 만든 제대.세 분의 수사가 있는 수도원은 고요하다. 미사를 드리며 부르는 순례단의 노래가 바위벽에 부딪쳐 건너편 산으로 오른다. 성인의 기도가 산을 내려가자 기를 쓰고 올랐을 옛 사람들의 찬가를 오늘은 순례자들이 부른다.3층으로 된 수도원의 맨 위는 성당, 2층은 동굴성당, 아래층은 작은 베란다와 정원에 이어 수도원이 있다. 제비집 수도원 성당에 시에나 화가들이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좁고 긴 바닥에는 강렬한 모자이크화가 있고 수난과 부활 그림은 교육용으로 사용하였다. 성인이 유혹을 이기려고 가시밭에 맨몸을 굴리자 가시 없는 장미꽃이 핀다. 1223년 이곳을 찾은 프란치스코도 같은 경험을 한다. 두 성인의 세기적 만남, 천사들이 산을 감싸고 천상의 노래가 가득했을 그날, 프란치스코가 가져온 가시 없는 장미는 없지만 작은 정원에 이 겨울 붉은 장미 몇 송이 피어 있다.수비아코수도원 2층에 마련된 동굴성당. 베네딕토 성인의 첫 수행장소로 알려진다.거룩한 동굴성당에서 임의 절대고독 앞에 선 그를 잡고 순례단은 차례로 기도한다. 염원은 달라도 천상을 그리는 마음은 뜨겁고 머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접는다. 수비아코수도원 전경. 해발 410m 수비아코 마을을 지나 깊은 골짜기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하늘의 옷감 몬테카시노수비아코를 떠나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살기 위해 몬테카시노로 간 성인은 독살의 위협을 받고 완고한 마음을 깨우치며 동굴기도로 돌아가 12개 수도원을 세우고 은둔생활을 마친다. 오후 4시 기도에 맞추기 위해 지그재그 가파른 고개를 오른다. 저녁 안개 엷게 두른 카시노의 사방 산들, 구름은 군데군데 산자락을 둘러 너른 카시노의 그윽함이 펼쳐지는 저녁산정에서 성인이 보았을 풍경. 산꼭대기 수도원은 사라센침략과 지진, 전쟁으로 파괴되고 재건된 여기서 인간의 황폐한 마음도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부가 머문 이곳에서 군종사제는 대공세에 대비해 중요한 것을 바티칸으로 옮기고 몬테카시노는 전쟁의 번제물이 된다. ‘몸은 이곳에, 마음은 고국에, 영혼은 천국에 있다’는 폴란드병사의 묘지를 보며 긴 계단을 올라 들어간 성당, 높은 제대 가대에서 들리는 수도원의 저녁기도는 아득하고 가늘고 높게 제대와 독서대와 금빛 나는 성당에서 천사와 함께 찬미를 드리는 굉장한 시간, 검은 옷의 수사 열 분이 기도를 마치고 가만히 내려온다. 어떤 사념도 없는 기도의 얼굴로 검은 수도복에 묻혀 평생을 봉헌한 노 수사들이 저녁 빛에 경건하다. 성당의 천국그림은 수사들에게는 현재이며 순례자에게는 이상이다. 베네딕토 성인과 여동생의 무덤 위에 만든 제대에서 같은 날 태어나 죽어서도 함께 하며 엄한 오빠를 사랑과 완덕의 길로 이끈 쌍둥이 여동생처럼 사랑의 길이 되고자 순례단은 기도한다. 체코에서 출발하여 믿음의 여정을 지난 격한 감정을 수도원의 아버지가 큰 손으로 어루만진다. 이집트풍의 지하경당에서 순례의 여정은 막바지로 치닫는다. 분홍빛 노을과 짙은 구름이 하늘을 채운 몬테카시노는 예이츠의 시처럼 어우러진다. 금빛 은빛으로 밤과 낮과 저녁의 푸르고 어둡고 캄캄한 하늘의 빛으로 짠 옷감을 베네딕토 성인은 하느님 길에 깔아드렸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수도승들이 오늘도 하늘의 옷감을 짜고 있다. ※ 영상이 안보이시는 분들은 보안 콘텐츠 표시를 모든 콘텐츠 표시로 설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입력일 2014-02-27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제9차 유럽 수도원 순례] (2) 오스트리아 알프스 지역 수도원

오스트리아 수도원 지도에 점점이 박힌 수도원 중 가톨릭신문사 수도원 순례단이 방문한 곳은 일부이다. 겨울순례는 폭설에 길이 막힐 수도 있다. 깊은 알프스 계곡에 위치한 라인과 포라우 길은 눈도 추위도 없었다. 고요와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산중 수도원에서 순례단은 영혼의 맑음과 깊이를 더하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념 경당에서 합창하며 다시 성탄의 기쁨으로 순례의 절정을 치달렸다. ■ 부르심의 활기, 하일리겐크로이츠유명한 빈 숲 속 시토회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에 도착하자 TV 다큐멘터리팀이 취재 중이다. 하얀 수도복에 검은 스카풀라를 착용하는 시토회는 은수적 수도회로 매우 소박하며 성 베네딕토 회칙을 기초로 단식, 침묵, 단순노동 등을 엄격하게 준수한다.1133년 설립된 이곳은 기도가 끊어진 적이 없다. 히틀러도 나폴레옹도 사라센도 들어오지 못한 비엔나신앙의 뿌리이며 영혼의 안식처인 성십자가 수도원, 1182년 성십자가 조각 전시 후 회개와 우도의 고백은 계속된다. 한국순례단은 경배하며 성 금요일의 마음으로 영성체하며 무수히 나누어진 부활의 빵을 모신다.낮은 데로 임하시는 임의 모습으로 사는 마흔 명이 넘는 수사가 바치는 낮기도. 절반은 젊은 수사라 영적 풍요 속에 웅장하고 힘차고 거룩한 정오의 그레고리오 영광경에 잠겨 무수히 허리 굽혀 절하는 수사들. 깊고 고요한 세상에서 아름답고 선하고 가치 있고 참된 것을 향하여 자유를 찾은 수도승들, 지도신부님은 그것이 진정한 자유요 해방이라신다.33년을 여기서 살며 바로크 화려한 삼위일체탑과 여러 작품을 남긴 지오반니 줄리아니는 하느님께 사로잡혔다. 기품어린 회랑은 냉엄하고 고고하며 예술가가 만든 생명의 샘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수도원의 쉼 없는 정신을 깨운다.1802년 설립한 수도원 신학 철학 대학에는 238명의 신학생이 있고, 거룩하고 화려한 성화와 조각들의 바로크 성당과 제의실에는 수백 년 영혼의 울림을 주는 예술과 신앙의 장관을 보여준다. 1825년 슈베르트가 두 작품을 초연한 오르간은 1804년 제작된 오스트리아 최대의 것이다. 기도와 침묵으로 81세의 줄리아니가 만든 가대는 혼신을 다한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유명한 성가대와 귀중한 문헌을 소장한 도서관, 800년간 오스트리아 음악의 중심이 되고 수도원 최초로 인터넷 선교를 집중적으로 전개한 하일리겐크로이츠는 유럽에서 가장 활동적인 부르심의 수도원이다.빈 숲 속에 위치한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아름다운 포라우 골짜기 수도원공동생활규칙을 바탕으로 세 가지 서원을 하며 초기교회 사도들을 모범으로 삼는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은 모두 사제들이다. 가정학 전문학교와 피정의 집을 운영하는 15개 첨탑과 빨간 지붕의 포라우 수도원은 지난 밤 내린 비에 말갛게 씻긴 대기 속에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아래 아름답게 서 있다.1163년 설립한 수도원은 소실, 1660년 복원, 90년 동안 꾸민 내부는 정교한 나무상감과 날아오를 듯 생생한 천사 조각상만 900점, 당시 부와 신심을 보여주는 2.5㎏ 순금장식과 제의실 등 총체적 바로크예술의 빈틈없는 집합체이다.아우구스티노회 포라우 수도원에는 16분이 생활하는데 작업복 차림의 젊은 수사와 노 수사 둘이 드리는 정오기도는 맑고 밝아 하늘빛을 닮았다. 경건하게 손 모으는 기도시간, 잠시 지나더라도 여운은 길어 찬미가락은 저미도록 일상에서 떠오른다. 정원에서 만난 눈부신 햇빛은 기도의 화답송인 듯. 분홍빛이 들어간 수도원은 밝고 화사하고 봄처럼 곱다. 온 세상이 찬미를 드리는 푸른 하늘빛에 잠기는 포라우, 방어용 첨탑과 해자와 강철로 된 큰 문의 수도원은 대자연의 향연과 수사들의 기도로 알프스 산속 믿음의 기둥으로 우뚝하다.포라우 수도원 전경.총체적 바로크 예술의 집합체인 포라우 수도원 성당 내부. 900점의 천사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유서 깊은 라인 수도원해발 1010m 고지 알프스 고개를 넘어 찾아간 유서 깊은 라인에 1129년 레오폴드는 바바리아 베네딕도회 수사들을 데려왔다. 수백 년 역사가 예사로운 라인 수도원은 시토회가 설립한 서른여덟 번째 수도원이며 현재는 가장 오래된 시토공동체로 한국팀은 처음 방문한다.1400여 년 전 여자와 노예는 일만하고 남자들은 철학과 전쟁을 하던 시대에 베네딕토 성인은 ‘남자여, 일하라, 손을 더럽히라’며 수사들에게 일하고 기도하고 성독하게 하여 노동에는 품격을, 유럽문화에는 큰 영향을 준다. 도서관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는 시토회 활동지역 지도가 있고 가장 많은 곳은 10개의 공동체가 있는 베트남이며 한국에는 아직 창설되지 않았다. 수사님은 짐승을 먹여 양피지를 만들었다며 깃털과 갈대, 빨대와 철필을 사용한 옛 필기구를 들고 볼펜을 내민다. 1400년 전 보리수껍질 잉크를 수도원 김나지움 화학 교사가 옛 방식으로 만들어냈다.“책의 가치는 이렇게 펴서 읽는 것”이라며 중세의 책을 펼쳐 보인 10만 권 장서의 도서관은 인류의 보고로 지역 발전에 끼친 공적은 대단하다.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라인 수도원은 오래된 벽과 그림, 고서들과 조각품과 회랑과 계단까지 그윽한 운치를 품고 순례자의 영혼과 정서와 머리를 휘황하게 한다1100년대 정원을 지나 아름다운 성모경당에서 순례단은 ‘자모신 마리아’를 정성껏 바친다. 성모님의 눈은 따스하고 엄마 머리칼을 잡은 아기는 기쁜 샘물이 된다. 고딕풍의 성모상은 움직임이 있다. 저녁기도인 듯 바람이 지난다. 알프스 깊은 산중, 혹독한 겨울을 하느님과 함께 사는 수사들, 꽁꽁 언 빵을 먹으며 고행의 길을 간 그들은 순례의 길을 알려준다.라인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된 중세기 서적.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라인 수도원.라인 수도원 성모경당의 성모자상.■ 하느님의 사랑 마리아 젤 수도원수도사 막뉴스는 1157년 은총의 성모상을 모시고 첼리탈 산속으로 들어온다. 큰 바위가 가로막자 기도로 바위를 부수고 그 위쪽에 성모님을 모신 작은 방 마리아 젤을 짓는다. 순례자들이 찾고 많은 기적이 일어나며 종교분열 후 합스부르크 왕가가 국립성모성지로 선포한 후 오스트리아 최고의 성모성지가 된 마리아 젤에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와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순례하였다. 성지가 보이는 고개 위에 있는 마리아 젤 가르멜 수도원은 2층 작은 집으로 소박하다. 아늑한 성당에서 원장수녀님은 자신이 만든 토실하고 예쁜 아기와 구유를 보라며 맑고 밝게 웃는다. 별다른 예술품도 장식도 없이 12명의 수녀가 하늘나라의 확신으로 사는 이곳은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을 순례단에게 전한다. 가느다랗게 합해지는 저녁기도는 봉쇄의 벽을 넘어 스펀지의 물처럼 스며든다. 풍요로운 사회에서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과 가난한 산 위에서 기쁘게 사는 수녀들. 성소자가 없어 한국순례단의 젊은이에게 입회를 권한다. 마리아 젤 은총의 성모님께 오늘 저녁은 성소를 위해 기도하자고 순례자들은 말한다. 가난한 수녀의 기도가 세상의 기쁨이 되도록!

입력일 2014-02-25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제9차 유럽 수도원 순례] (1) 체코와 헝가리 미지의 수도원 - ‘사자바’와 ‘파논할머’

유럽교회의 유서 깊은 수도원들을 찾아 가톨릭교회 정통 영성을 확인하는 가톨릭신문 제9차 수도원 순례가 지난 1월 6~18일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4개국에서 진행됐다. 총 30명이 참가한 가운데 김정우 신부(대구대교구 대신학원장) 지도로 이뤄진 순례는 수도원 발전의 역사를 역순으로 순례하는 일정이었다. 특별히 베네딕도수도회 중에서도 수도원 쇄신에 앞장섰던 시토회를 중심으로 순례가 펼쳐졌다. 순례에 참가한 노춘석(멜라니아)씨의 체험기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 수도승의 영성과 오랜 신앙의 터전이 된 곳을 찾아 믿음과 사랑을 깊게 하는 제9차 유럽 수도원 순례는 체코 프라하의 아기예수성당 미사로 출발한다.아기예수님은 3천벌이 넘는 옷을 두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작은 모습으로 순례단에게 모든 것을 탈탈 털어내고 순례를 하라신다. 공산치하의 혹독한 박해 이후 하느님이 멀어진 체코에 그 옛날 스페인의 수사가 새긴 아기예수는 슬프고 몽롱한 눈빛으로 신앙의 봄을 바라신다.잘 알려지지 않은 체코 사자바 수도원과 헝가리 파논할머 수도원, 알프스 깊은 골짜기 오지에 있는 오스트리아 포라우와 라인 수도원, 마리아젤과 이태리 마돈나 델라 코로나 등 여러 곳을 순례할 기대와 설렘은 이미 일상을 버리고 하느님 세상으로 이끌어준다.프라하에 살았던 카프카문학의 부조리가 오늘은 신앙의 절망과 부조리를 보여주는 황금소로의 프라하, 카펠교 위, 네포목 사제의 발이 닳도록 소원을 비는 사람들과 광장의 화려한 트리 불빛과 흥청거리는 밤거리의 프라하는 다만 낭만의 옛 도시였다. “나를 불쌍히 여기세요. 그러면 나도 여러분을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경배하는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라는 아기의 속삭임은 애절하게 불타바 강물처럼 흐르고 동방전례와 슬라브 신앙의 터전이었던 사자바로 순례단은 떠난다. 체코 프라하 아기예수성당의 전면.■ 폐허에 울리는 사자바 기도 수도원 창설 이래 한국팀의 첫 방문이라며 관리인은 겨울에 문 닫은 수도원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사자바는 1032년에 울드리히 왕자가 세운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사자바마을 위쪽에 있다. 쭉쭉 뻗은 나무숲을 지나 마을이 나오고 미완성인 수도원의 황량한 붉은 종탑의 빈 창문에는 마른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기둥 사이 파란 잔디밭은 공허한 폐허의 느낌을 준다. 낡은 담은 부스러지고 종탑 앞에서 말을 잃은 순례자들은 정원에서 역사를 듣는다. 1097년 동방전례 발전과 키릴문자를 만들어 슬라브 성서 번역과 복음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수도원에 로마교황청은 동방전례를 금지시키고 초대원장 프로코피우스는 화형된다. 15세기 후스의 종교개혁으로 성당 건축은 중단되고 1785년 요세프 2세의 수도원 해산으로 문을 닫아 현재는 슬라브 민족의 유품과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역사전시관이 되었다. 피폐해진 수도원은 역사의 무상함이 곳곳에 남았지만 촛불이 켜진 작은 경당에는 프레스코화의 은근한 성화들과 1천의 악마를 이긴 창설자 프로코피우스 성인의 유해와 성모님의 생애를 그린 아름다운 벽화 앞에서 지금도 사자바 사람들은 옛 수도원의 전통을 지켜 세 시간마다 돌아가며 기도를 하며 언젠가는 수사들의 힘찬 찬미노래로 적막강산 사자바가 찬란한 하느님의 영광이 될 날을 기원한다. 겨울나무 사이로 남빛 구름이 걸린 아름다운 사자바에서 빼곡한 잎을 버리고 다른 풍경을 담는 프라하의 아기 예수님이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여!”라며 오신다.체코 사자바 수도원의 종탑.■ 헝가리인의 영혼의 고향, 파논할머 수도원공산치하 동구권에서 신앙의 터전을 유일하게 지켜낸 대단한 헝가리 파논할머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 마르티노의 유골을 모신 지하 성십자가 성당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 작은 경당은 13세기 벽과 장식 그대로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한 이곳의 원래 건물은 소실되고 13세기 초 고딕으로 재건되나 오스만터키군의 침입을 받아 파괴되어 17세기 바로크양식으로 화려하게 복구된다.헝가리, 멀고 먼 낯선 수도원을 찾은 순례단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공산당의 박해와 투옥과 고문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순교정신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라틴어 필사본 등 40만권 장서가 있는 베네딕도회에서 가장 큰 도서관을 가진 파논할머, 층층이 쌓인 고서들 위로 높은 천장 유리창에 스미는 빛과 화가와 건축가의 신심어린 손길이 넓게 담긴 아름다운 19세기 도서관은 옛 시대를 말하고 있다.검은 두건의 수도승이 사다리에서 내려와 창가에서 조심스레 책장을 넘길 무렵, 창밖에 함박눈이 휘날리면 완전한 고요가 내려앉고 무아지경에 빠진 오래 전의 수도승, 그가 몰입한 오로지 하나의 세상……. 지적 영적 정서적인 욕심을 마음껏 누려도 좋을 수도승의 충만한 시간의 흔적인 책 냄새는 넓은 홀에 가득하다. 1001년 라틴어로 된 수도원 허가서와 “사랑에 빚을 지지 마십시오.” 라는 최초의 헝가리어로 쓰인 「사랑헌장」은 귀중한 보물이다. 핍박과 압제의 공산치하에서 수도원은 자유주의 항쟁을 강하게 펼쳐 모든 것을 지켜내었다. 해방 후, 북한 덕원 수도원의 책과 귀중한 문서들은 포장지가 되고 파이프 오르간은 고물상에 넘겼다는 말이 아프게 닿는 곳, 어느 탈북 형제는 오랜 세월 하느님이 자신들을 버린 줄 알았다고.이곳은 토속신앙의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이끌어 990년 부족장 기저의 도움으로 첫 수도원이 설립된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거룩하게 꾸며진 성당과 베네딕도 성인의 일화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는 수도원을 돌며 역사와 문화와 신앙을 만나는 시간, 성인에 대한 마음이 깊어진다. 우리 순례의 끝자락은 수비아코와 몬테카시노, 거기서 우리는 수도원의 아버지인 베네딕도 성인을 제대로 만날 것이다. 경당의 신형 오르간은 줄리아드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자매의 연주로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순례의 기쁜 미사가 된다. 수도원 베란다에 서면 언덕 아래 쫙 펼쳐지는 파논할머와 저 멀리 들판과 산들이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는데 안개 자욱하여 붉은 지붕의 마을만 어스름하다. 중세의 추억은 안개에 묻혀 아스라이 멀다. 저 아래에서 수도원을 올려다보며 하늘세계를 기원하며 기도의 삶을 산 무수한 사람들, 그 열망은 거대한 파논할머 수도원과 헝가리의 정신과 긍지가 된다.파논할머를 건축하며 먼저 동쪽 제단을 만들어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한 수사들의 마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사랑에 빚을 지지 않는 세상을 만든다. 파논할머의 30여 명 수사들은 헝가리 교회의 중심이요, 신앙의 지주요 영혼의 고향에서 신앙 수호를 위해 고통의 역사를 지나 당당하게 부활한 승리를 증거하고, 수도원 김나지움 학생들은 중세 유럽 문화의 동부지역 교두보 역할을 한 수도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 동유럽에 하느님의 사랑을 꽃피우는 등불로 자라기를 키 큰 미루나무들은 꿈꾸고 있다. 사자바의 씁쓸함이 환희가 되는 파논할머 수도원 순례는 마음 깊은 사랑이 되고 좋은 것을 나누기 위한 순례라는 지도신부님의 말씀처럼 참 은총의 시간을 누리며 안개길을 따라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한다. 알프스 깊은 산속 수도원으로!헝가리 파논할머 수도원 도서관. 라틴어 필사본 등 40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파논할머 수도원 성당 내부.

입력일 2014-02-18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 유럽 수도원 순례] (6·끝)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디딤돌 삼아 더욱 확산된 가톨릭 전통 영성

서방 수도회의 모태를 완성한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은 베네딕토회 뿐 아니라 시토회를 통해 더욱 엄격하게 실천됐고, 아우구스티노회를 비롯한 다양한 수도회 설립과 운영의 디딤돌이 됐다. 8번째 진행된 가톨릭신문의 ‘수도원 순례’ 는 유럽 베네딕토회 수도자들과의 만남에 이어 시토회와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 방문으로도 이어졌다. 마지막 여정에서는 한국인 순례단을 처음으로 맞이한 시토회 츠베틀 수도원과 오스트리아 아우구스티노회의 중심인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등을 돌아본다. 시토회는 프랑스 시토(Citeaux) 지역에서 로베르토 성인(St. Robertus de Mokesme)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베네딕토 성인이 남긴 규칙서를 기초로 단식과 침묵, 단순 노동 등의 규칙을 더욱 엄격히 적용하기 위해 설립된 수도회다. 오스트리아 시토회 수도원의 하나인 ‘츠베틀 수도원’(Stift Zwettl)은 1138년 9월 15일에 수도원 축복식을 갖고, 1140년 교황 이노첸트 2세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 인가를 받은 곳이다. 아쉽게도 현재 수도원 성당은 개보수 중이어서, 순례단이 방문할 순 없었다. 수도원은 축성 기념일인 9월 15일 다시 성당 문을 열 계획이다.이 수도원은 12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석조 건물 뿐 아니라 14세기 로마네스크식 건물과 18세기 들어서 증축한 바로크양식의 건물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12세기 지하성당과 수도원은 옛 수도자들의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한 공간이다. 수백 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흐르는 물 위에 나무로 변기를 만들어 사용한 일종의 수세식 화장실 등도 눈길을 끈다. 시토회 수도자들은 평소 아이보리색 수도복에 검정 스카플라를 갖추는 것도 특징이다. 세상에서 건져 올린 인간적인 화려함을 모두 없애고, 엄격한 규칙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묵상할 뜻을 표현한 것이다.반면 ‘스탐스 수도원’(Stift Stams) 성당은 시토회라고 보기에는 꽤나 화려한 면모도 드러내 보인다. 설립 당시 이곳 수도원은 귀족들의 거주지와 묘지 등도 함께 갖춰야 했다. 겉에서 볼 때 화려한 양파 모양으로 꾸며진 종탑도 종교적 상징이라기보다는, 귀족들이 경치를 잘 보고자 활용한 일종의 전망대였다. 이 종탑은 물론 자신들의 권세를 드러내고자 성당을 화려하게 꾸미려는 귀족들 때문에, 당시 수도자들은 긴 고민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성당에는 종탑을 올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귀족들의 거주시설을 화려하게 꾸미는데 동의했다. 귀족들이 음악회와 모임 등을 열던 다목적 공간에는 그 당시 건축기술로는 획기적으로 선보인, 오케스트라용 천장 테라스도 갖춰져 있다.스탐스 수도원은 티롤 지역 영주였던 마인하르트 2세와 그의 부인 엘리자베트가 프랑스와의 전쟁 중 사망한 아들의 영혼을 위해 세웠다. 이곳은 원래 요한 세례자를 기리는 순례지였다. 이후 수도원이 건축되면서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됐다. 시토회는 베르나르도 성인에 의해 성모 신심을 더욱 강화한 수도회로 꼽힌다. 스탐스 수도원 또한 성모 공경의 구심점으로 성모 축일과 관련한 내용으로 가득 채운 천장화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수도자들은 지금까지도 전통 공법 그대로 과일주인 슈납스와 과일잼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이 판매 수익금은 전액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 운영에 활용된다. 수도원이 운영하는 교육시설은 일부 귀족층만 누리던 교육의 혜택을 모든 이들과 나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엄성을 실천하는 구심점으로도 의미를 더해왔다.‘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Stift Klosterneuburg)은 이번 ‘수도원 순례’ 여정의 시작점인 비엔나 인근에 자리한다. 이곳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중세와 현대 사이에 서 있게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입구에는 현대 건물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동문이 세워져 있지만, 그 문에서 계단 몇 개를 오르면 중세 때부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육중한 철문을 마주하는 덕분이다. 공간 전체에 900여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는 현대 미사양식을 만들고 실험하던 경당도 남아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실현된 획기적인 개혁 중 하나가 전례 부분에서 있었다. 당시 공의회 위원들은 미사 쇄신을 위해, 요즘과 같은 잔치와 만찬 형태의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제대와 독서대 등을 만들어 이곳에서 실험적인 미사 봉헌을 실시했다. 이 클로스터노이부르크는 오스트리아 아우구스티노회의 대표적인 수도원이다. 아우구스티노회는 처음에는 탁발수도회로 시작, 하느님을 탐구하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특히 설교 분야 발전 등을 비롯해 교회 성장에 큰 힘이 되어왔다. 또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사제들은 수도복 위에 흰 띠를 두르고 있는데, 이는 모니카 성녀가 아들인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한 마음을 기억할 것을 상징한다.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은 1114년 바벤버거 왕조 레오폴드 3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아녜스가 세웠다. 신앙심이 남달랐던 그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외에도 많은 수도원을 짓는데 힘을 쏟았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기도 하다. 노이슈티프트(Stift Neustift)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자리 잡은 아우구스티노회이다. 이곳은 이탈리아 로마와 각 성지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수도원은 순례자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도 지어졌다.현재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영성을 따르는 사제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18개 본당 사목도 펼치고 있다. 특히 수도원은 16세기부터 교육사업에 매진, 지역민들의 교육·문화 수준 향상을 이끌어내고 우수 인재를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해왔다. 교회 안에서는 종종 신학교를 교회의 심장으로, 수도원을 교회의 폐에 비유하곤 한다. 신학교를 통해 온 몸에 피를 공급하는 사목자를 양성한다면, 수도원의 헌신을 통해 교회가 지속적으로 숨을 쉴 수 있다는 표현이다.실제 수도원은 교회의 모든 이를 대신해 쉼 없이 기도하며, 교회 쇄신의 디딤돌이 되어 있다. 반면 수도원들이 외적 발전에 치우쳐 영적으로 쇠퇴하면서, 그 안에는 세속적인 영향이 스며들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원들은 그 때마다 세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복음으로 더욱 새로워지고자 ‘엄격함’을 발휘하곤 했다. 익숙하고 혹은 낡은 것에 머무르지 않고, 낯설고 새로운 것을 기꺼이 맞아들여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이었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대성당 전경.다른 시토회 성당들에선 볼 수 없는 화려한 제대 장식물. 천국의 문을 상징하는 양쪽 기둥 안쪽으로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베네딕토, 베르나르도 등의 성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츠베틀 수도원에 들어선 순례객들은 가장 먼저 수도원과 성당을 잇는 회랑과 마주하게 된다.츠베틀 수도원은 현재 대성당 개보수를 진행 중으로, 예전에 창고로 쓰던 반지하 공간을 임시성당으로 사용 중이다.노이슈티프트 제대 옆 설교대에서 바라본 십자가와 성당 뒷 전경.

입력일 2013-04-02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 유럽 수도원 순례] (5) 성모 공경의 구심점으로 세워진 에탈·아인지델른 수도원

수도원은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흔히 ‘사랑의 학교’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교회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이가 바로 성모 마리아이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마리아를 공경해왔다.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순명의 자세, 구원 역사 안에서 묵묵히 진리를 실천해온 신앙의 모범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이다.이번 호에서 돌아볼 독일 에탈과 스위스 아인지델른 수도원은 유럽 베네딕토회 수도원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성모신심 순례지로 꼽힌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통해 하느님께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순례객들의 발걸음은 수도원 설립 후 10000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해발 900m 높이의 계곡 마을을 향해 굽이굽이 산길을 돌다보면 어느 틈엔가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에탈 수도원(Stift Ettal)이 눈앞에 성큼 다가선다. 가로 세로 각각 100m 길이로 둘러싼 대형 건축물이다. 특히 수도원은 규모와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에서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어두움이 내려앉아 성당 문이 잠길 때까지,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는 듯한 성모자상 앞에 무릎을 꿇은 순례객들의 기도는 끝날 줄 모른다. 이 성모자상이 바로 ‘에탈의 마돈나’이다.에탈 수도원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알프스 산자락 암머 계곡에 위치한다. 암머 계곡은 중세시대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이탈리아 베로나를 오가는 상업적인 길목이었다. 독일이 이탈리아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활용해야 할 주요 거점이기도 했다. 바이에른의 황제 루드비히 4세는 성모 마리아에게 전구를 청하던 중 이곳에 수도원을 짓겠다고 약속, 1930년 이곳에 수도원을 세워 봉헌하고 에탈이라고 이름지었다. 에탈은 ‘약속의 계곡’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피사에서 가져온 이른바 ‘에탈의 마돈나’를 기증했다. 수도원은 처음엔 순수하게 수도생활을 위해서만 봉헌되진 않았다. 루드비히 4세는 이곳을 베네딕토회 수도자들 뿐 아니라 기사수도회 회원들과 그 부인들까지 함께 거주하고, 전략적 요충지로도 활용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으로 꾸몄다. 하지만 1347년 루드비히 4세 선종하자 기사 수도회는 이곳을 떠났고, 이후 수도원은 베네딕토회 영성의 샘터로 깊이 뿌리내렸다. 15세기부터는 성모신심 순례지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최근엔 해마다 200여만 명의 순례객들이 찾고 있다.수도원 대성당은 1330년부터 40년간 지어 봉헌됐지만 1744년 화재로 전소됐다. 고딕과 바로크 혼합 양식으로 지어진 현재 성당은 1762년 완공됐다. 이 성당에 들어선 순간, 순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또 하나의 걸작은 1769년에 제작된 천장 프레스코화다. 이 프레스코화에는 성 베네딕토의 가르침을 따라 산 성인들과 남여 수도자 400여 명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대성당 왼쪽 구석에 있는 작은 문을 밀면,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현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성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대 뒷면은 대형 유리벽과 스테인드글라스로 빛을 발하고, 제대는 세계 각국 언어로 ‘빛’이라고 쓴 유리 조형물이 떠받치고 있다. 평일미사와 기도는 이곳에서 봉헌된다.타 수도원에 비해 젊은 수도자들이 많은 에탈 수도원에서는 현재 학교는 물론 농장과 양조장, 인쇄소, 게스트하우스 등을 활발히 운영 중이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발발한 이후 스위스에서는 제네바를 중심으로 칼뱅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츠빙글리가 새로운 종교개혁을 이어갔다. 이후 개신교가 강세를 보인 때도 있었지만, 현재 스위스 전체 인구의 40% 이상은 가톨릭신자로서 복음화의 뿌리를 지켜오고 있다. 아인지델른 수도원(Stift Einsiedeln)은 지금도 스위스의 대표 성모신심 순례지로 유명하지만, 10세기에는 스페인 콤포스텔라와 심지어 이탈리아 로마와도 우열을 다툴 정도로 이름난 곳이었다. ‘검은 성모상’은 그 명성의 한가운데에 자리한다.‘검은 성모상’은 9세기 중반, 호엔촐레른 백작 집안 출신의 마인라트 성인(St.Meinrad, ?~861)이 에첼산 속에서 은수생활을 할 때 취리히의 힐데가르트 수녀의 요청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마인라트 성인이 선종하고 80여 년 후 그의 은거지에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검은 성모상’에는 순례객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목각 성모상이 검은 색을 띠는 이유도, 순례객들이 쉼 없이 촛불을 켜서 생긴 그을음 때문이라고 전해진다.대성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은총의 성모’ 경당 앞에 서게 된다. ‘검은 성모상’이 안치된 곳이다. 수도자들은 이 ‘검은 성모상’에 매달 다른 나라의 전통의상을 입힌다. 가톨릭신문 순례단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엔 마침, 한국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수녀들이 만든 붉은 자수 옷을 입고 있어 반가움이 더했다.아인지델른 수도원 대성당은 18세기에 지어진 스위스 바로크 건축물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금빛과 연분홍빛 등으로 화려하게 꾸민 대성당 내부 색감도 압도적이다. 성당 곳곳에 그려지고 조각된 천사상만 해도 1000여 개가 넘는다. 또 수도원 도서관은 그레고리오 성가 필사악보와 라틴어 고서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쓰여진 양서 23만권을 소장하고 있다.이 수도원은 50여 년 전만 해도 회원 수가 200여 명을 넘어서는 대규모 수도공동체였다. 하지만 성소자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현재는 70여 명의 수도자들만이 남아 수도원과 사립대학, 신학대학, 직업학교 등을 운영 중이다. 그래도 수도자들의 찬송만큼은 1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웅장하게 수도원을 채우고 있다. 특히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성모찬송) 시간이 다가오면 수많은 순례객들과 인근 지역 주민들이 성당으로 모여든다.매일 오후 4시30분 성모찬송이 시작된다. 제대 주변에 둘러서서 기도하던 수도자들의 행렬은 살베 레지나 막바지에 이르자 성모경당으로 이어진다. 그 행렬이 지나가는 성당 지하에는 수도자들의 시신을 안장하는 카타콤바가 자리한다. 수도자들은 매일 이 카타콤바 위를 걸으며 죽음의 의미를 되새긴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 영원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과 죽음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매일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 삶의 의미를 더욱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일반인들의 눈에는 답답한 규율에 매인 것처럼 보이는 수도자들의 삶이 그 누구의 삶보다 자유로운 것은, 영원한 삶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기 때문임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살베 레지나 행렬은 수도자들의 합송하는 그레고리오 성가소리와 함께 대성당 제대에서 입구쪽에 자리한 성모경당까지 이어진다.에탈 수도원은 1744년 화재 피해를 입어, 1762년 고딕과 바로크 양식을 혼합한 형태의 새 성당을 완공했다.수도자들은 전 세계 각지에서 방문하는 순례객들도 배려, 평균 한달에 한번씩 각기 다른 나라의 전통의상을 검은성모상에 입힌다.수도자들은 대성당과는 확연히 다른 현대적인 모습으로 꾸며진 소성당에서 평일미사와 매일기도를 봉헌한다.

입력일 2013-03-20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 유럽 수도원 순례] (4) 세상 안에서 영원한 삶을 드러내는 전통 수도원 프라우엔킴제·샤이에른 수도원

샤이에른 수도원에 이어 정원 뒤로 피정의 집이 보인다. 수도원 성당 문을 받히는 돌의 두께는 한 뼘을 넘어선다. 그런데 그 묵직한 돌 가운데가 움푹 닳아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스쳐가야 그렇게 닳을 수 있는 지 가늠하기가 쉽잖다. 수많은 이들이 성당 문턱을 넘어 들어와 수도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또 수도자들에게 기도를 청한다.수도자들은 일생을 다해 하느님을 찾아가는 삶을 살며, 하느님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연스럽게 그 삶은 세속과는 멀어져 있다. 세상의 가치는 무조건 나쁘고 교회만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을 위한 삶에 투신하기 위해 세상과 멀어짐을 상징한다. 청빈과 정결, 순명의 서약은 하느님을 위해,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버려나가도록 돕는다. 특히 베네딕토회 ‘수도승’들의 삶은 수행을 통해 관상생활, 즉 하느님과 일치하는 영적 여정이다.수도원 순례는 수도자들의 공동체 생활과 그 삶을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내 삶 안에서도 되새기도록 이끈다. 베네딕토 성인이 공동체를 만든 본래 목적도 사도직 활동 등은 아니었다. 성인은 오로지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살기 위해 한 곳에 머무르는 ‘정주’(定住)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들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각 지역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이나 학문, 선교 활동 등에 종사해왔다. 하지만 베네딕토회 공동체들이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엔 반드시 아빠스좌 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원칙이다. 각 아빠스좌 수도원들은 서로 종속관계에 있지 않고, 각자 독자적인 운영을 하는 이른바 자치수도원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베네딕토회 수도원들은 하나의 베네딕토회라기 보다는,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들이 유대를 맺어 연합한 ‘베네딕토회 총연합’으로 존재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한 수도원 순례 여정이 독일로 이어지면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프라우엔킴제 수도원’(Abtei Frauenwoumlrth im Chiemsee, 이하 프라우엔킴제)이다. 이곳은 여성 아빠스가 있는 수도원으로 이름이 더욱 잘 알려져 있다.킴제 호수 인근은 독일 바이에른 주 뮌헨 남동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휴양지로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이기도 하다. 이 호수 안에 있는 3개의 섬 중 가장 큰 곳이 바로 프라우엔킴제(프라우엔인젤)다. 인구 300여 명의 작은 섬이지만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많은 순례객과 관광객들이 찾는 유서 깊은 곳이다. 프라우엔킴제는 오스트리아 크램스뮌스터 수도원 설립을 후원한 바이에른의 영주 타실로 3세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설립됐다. 772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 현재 수도원과 성당은 782년에 축복됐다. 이 여자수도원을 이끈 첫 아빠스는 카롤링거 왕조 루트비히 1세 왕의 첫째 딸인 일멘가르트(Seliqe Irmengard, 831~866)였다.아빠스(Abbas)라는 칭호는 12명 이상인 수도승 공동체의 최고 장상을 말한다.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연장자나 성덕에 뛰어난 수도승을 영적 아버지로 부를 때 사용된 ‘아빠’라는 칭호가 서방교회에 전해지면서 비교적 오래된 수도승 수도회들(베네딕토회, 시토회 등)에서 최고 장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게 됐다.프라우엔킴제는 10세기까지 운영되다 헝가리의 침입으로 잠시 해체된다. 이후 아우구스티노회 남자수도회가 섬에 들어와 생활했으며, 신·구교의 대표적인 대립인 30년 전쟁(1618~1648) 중에는 수도자들의 피난처로 활용되기도 했다. 프라우엔킴제 1803년이 되어서야 다시 베네딕토회 여자수도원의 모습을 찾게 됐다. 프라우엔킴제는 논베르크 수도원(Stift Nonnberg)과 함께 알프스 북부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수도회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에서는 타종교와의 대화와 만남의 장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일반인들도 다양한 모임과 세미나, 행사 등을 위해 수도원을 찾는다. 지금과 같은 사순기간은 생강빵을 찾는 이들의 방문이 더욱 잦아지는 때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 때부터 유명했던 수도원의 생강빵은 보존기간이 다른 음식보다 상대적으로 길어, 모든 것을 절약하는 사순기간에 주로 먹었다고 한다. 프라우엔킴제에서 101km를 달리면 ‘샤이에른 수도원’(Benediktinerabtei Scheyern, 이하 샤이에른)에 다다른다. 이곳은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 순례중 가져온 예수 십자가 조각으로 만든 ‘성 십자가’가 보관돼 더욱 유명해졌다.천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수도원의 시작은 10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원은 처음엔 산 속에 터를 마련했지만, 물 공급 등의 어려움으로 인해 세 번이나 이사를 거듭해야 했다. 바이에른 영주의 성채였던 현재 위치에 자리 잡은 때는 1119년이다.이 수도원 또한 30년 전쟁과 수도원 개혁운동 등으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838년이 되어서야 수도원은 재정비 단계를 밟으며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되살렸다. 1900년에는 100여 년 가까이 방치됐던 독일 에탈 수도원 등도 매입해 베네딕토회의 영성을 폭넓게 확산하는데 힘을 실었다. 1215년에 지어진 샤이에른 대성당은 화재 등으로 많이 훼손됐지만 수차례 다양한 양식으로 재단장되면서 뛰어난 예술성을 드러낸다. 대성당 안쪽에 자리한 옛 제의방은 수백 년 전에 만든 제의와 성경, 성화 등을 보관하는 성물안치소로도 활용 중이다.샤이에른은 독일 바이에른 지방 전통 맥주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샤이에른이 운영하는 맥주양조장과 식당은 수도원에 들어서는 아치형 입구 바로 앞에 자리한다. 1568년 문을 연 수도원 맥주양조장과 식당 등은 오랜 시간 유명세를 떨쳐왔다. 정육점에 판매하는 고기와 햄, 치즈 등도 바이에른 지방 전통방법과 바이오연료 사용 및 친환경용법 등을 접목해 만들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이러한 활동은 수도원 관리 운영은 물론 지역사회 경제 활성화에도 꾸준한 힘을 싣고 있다. 아울러 수도원은 지속적인 환경 보전을 위한 연구 등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학교와 기숙사, 게스트하우스 등을 통해 지역민들과 순례객들에게 보다 열린 공간을 제공한다. 샤이에른 수도원에서는 하루 4차례 공동기도가 진행된다. 정오 종소리와 함께 모든 일손을 놓고 소성당에 모여 기도하는 수도자들.프라우엔킴제 수도원 성당 뒷편에는 이곳을 찾아 기도한 후 응답을 받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체험담 등을 담아 봉헌한 액자 등이 걸려있다.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프라우엔킴제 수도원 성당 입구 디딤돌은 수많은 순례객들의 발걸음으로 움푹 닳아 있다.프라우엔킴제 성당 가운데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과 스콜라스티카성녀상이 자리한다.

입력일 2013-03-12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 유럽 수도원 순례] (3) 침묵의 가치를 알려주는 성 게오르겐베르크·성 람브레히트·제카우 수도원

이번 호에서 돌아볼 오스트리아 성 람브레히트와 제카우, 성 게오르겐베르크 피히트 수도원 역시 베네딕토 성인의 모범을 따라 사는 수도승들의 공동체다.베네딕토회(Ordo Santi Benedicti)는 베네딕토 성인이 남긴 수도규칙을 따르는 남여 수도회들의 연합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은 고전적 의미의 수도자(Religious)와 구분, 자신들을 ‘수도승’(Monachus)이라 부른다. 수도승 생활은 하느님을 찾는 삶 자체를 목적으로, 크게 ‘하느님의 일’(Opus Dei), ‘성독’(lectio divina), ‘노동’(labor manum)으로 구성된다. 흔히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를 베네딕도회 모토(moto)로 말하는 경향이 만연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기도하며 일하며 읽어라’(Ora, Labora et Lege)고 해야 더욱 맞갖은 표현이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수도자들의 곁에 서면 의외로 자연스럽게 침묵에 빠져들 수 있다. 너도나도 자기 말을 먼저 내뱉는 세상에서는 하느님의 소리가 작게 느껴진다. 하지만 수도원에서는 하느님 소리에만 귀 기울일 수 있는 충분한 침묵이 이어진다. 오스트리아 티롤 봄프 지방 ‘성 게오르겐베르크 피히트 수도원’(Stift St. Georgenberg-Fiecht, 이하 게오르겐베르크 수도원) 순례 여정은 그 시작부터 깊은 산을 휘감은 침묵과 동행한다. 이 수도원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산기슭에서부터 1시간30여 분간 깊은 협곡과 산등성이 몇 개를 넘어야 한다. 해발 2500m 꼭대기로 이어지는 산길에는 십자가의 길도 나란히 놓여져, 순례객들이 잠시 멈춰서 기도하며 숨을 고를 수 있게 한다. 15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다리 ‘호에 브뤼케’(Hohe Bruumlcke)도 산등성이를 휘돌아 올라가는 수고를 덜어준다. 게오르겐베르크 수도원의 역사는 1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 속에 작은 암자를 짓고 기도생활을 한 복자 라트홀트(Rathold von Aibling)의 모범을 따르는 이들이 늘면서 수도원이 지어졌다. 이곳은 1138년 베네딕토 수도회로 교황의 공식 인가를 받았다. 특히 1310년 미사 중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성혈로 변모하는 기적이 일어나고, 그 성혈이 보관되면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하지만 잦은 화재로 인해 수도원은 피히트 마을로 이전하고 이곳은 순례지로서만 남아 있다. 화마의 피해를 입지 않고 남은 피에타상을 비롯한 각종 교회미술품과 영혼을 정화하는 의미로 하얗게 꾸민 바로크 양식의 성당 내부 등은 순례 후에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남부 슈티리아 지방 위쪽에 자리 잡은 ‘성 람브레히트 수도원’(Stift St. Lambrecht)은 베네딕토 성인의 수도규칙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수도원이다.람브레히트 수도원은 겉모습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42~1945년 나치들은 수도원을 강제로 장악해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을 가두고 강제노역을 시키기 위한 수용소로 사용했다.해발 1028m 산 위에 세워진 수도원 성당에 들어서면 한기가 먼저 다가온다. 하지만 한겨울을 제외하면 이곳 수도원에서는 연중 다양한 콘서트와 모임, 회의 등이 연이어져 열기를 더한다. 각종 피정과 ‘생명학교’ 등도 관심을 모으는 수도원 운영 프로그램이다. 또 박물관은 베네딕토회의 역사와 영성을 담은 교회유물 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품과 조류전시관 등을 갖추고 있다. 대형 정원에서도 힐데가르트 폰 빙엔 수녀가 각종 약초와 꽃 등으로 꾸몄던 전통이 이어져, 봄·여름이면 갖가지 식물들도 만나볼 수 있다. 거대한 고딕양식으로 탄탄히 자리 잡은 수도원을 눈에 담기 위해서는 우선 한 바퀴 고개를 돌려야 한다. 이곳은 수도원과 농장, 광산 등을 포함한 대지만 50헥타르(50㎢)에 이르는 대규모 수도원이다. 수도원 소속 건물만도 100여 개이며, 설립 초기에는 상주하는 수도자들만도 130명이나 됐다고 한다. 현재 이곳 수도자들은 본당 사목 지원을 비롯해 피정 지도, 각종 상담 등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같은 슈티리아 지방에 위치한 ‘제카우 수도원’(Stift Seckau)도 오스트리아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전에 둘러본 크램스뮌스터, 멜크, 괴트바익 수도원 등에서는 또 다른 웅장함을 드러나는 수도원이다. 수도원 가까이 다가가면 성당 위로 솟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거대한 종탑 두 개가 맨 처음 순례객들을 반긴다. 이 성당은 지난 1930년 교황으로부터 일반 성당보다 격이 높은 ‘바실리카’의 특권을 부여받기도 했다. 곧바로 수도원 안내를 담당하는 수사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순례 여정은 8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중세와 현대를 오간다. 제카우 수도원은 처음에는 1140년 아우구스티노회로 출발했다. 이후 1218년 잘츠부르크 교구(현재 그라츠 교구) 주교의 지원 등으로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1782년 요제프 2세 황제의 수도원 개혁정책으로 인해 폐쇄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역사의 굴곡 안에서 수도원은 독일 베네딕토회의 문화투쟁(Kulturkampf)에 힘입어 1883년 베네딕토 수도회로 새로 문을 연다. 이후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꾸준히 키워온 수도원은 오는 2014년 성당 봉헌 850주년과 2018년 수도원 설립 800주년 기념의 해 준비로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수도원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깊은 생채기를 입었다. 1940년 제카우의 수도자들은 나치에 의해 추방당하고 수도원도 압류당해 몇 년간 문을 닫아야만 했다.현재 이곳 수도자들의 소임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김나지움(중·고등학교)과 운영이다. 수도원 김나지움은 오랜 기간 지역사회 인재를 양성하는 구심점이 되어왔으며, 현재도 1100여 명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학생들의 수업이 끝나는 오후면 수도원은 또 다시 깊은 침묵으로 들어간다. 눈 내리는 밤, 성 람브레히트 수도원 외부 전경.성 람브레히트 수도원 대성당 제대 정면.정상을 향한 고갯길에서 바라본 성 게오르겐베르크 피히트 수도원의 모습.성 게오르겐베르크 피히트 수도원 책임 수도승이 제대 뒷면 비밀감실에 보관 중인 그리스도의 성혈로 순례객들을 강복하고 있다.성 게오르겐베르크 피히트 수도원 뒤에서 본 종탑의 모습.제카우 대성당 제대 우측에 자리한 피에타상.8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제카우 수도원 대성당의 고딕 양식 십자가.제카우 수도원. 눈덮인 정원이 ㅁ자 형태로 지어진 수도원 건물에 둘러싸여 있다.

입력일 201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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